바로 그 인간성 포기가 문제였다.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전태일 동지 45주기에 부쳐

 

김승호  |  seung7427@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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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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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승호 전태일을따르는사이버노동대학 대표

전태일은 왜 1970년 여름 한 방울의 이슬이 되기 위해 발버둥쳤는가. 그가 볼 때 현실의 노동자가 비인간적이고 물질적인 존재인 노예였기 때문이다. “다 같은 인간인데 어찌하여 빈한 자는 부한 자의 노예가 되어야 합니까?” 이 말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노예를 괭이와 호미 같은 ‘생명 없는 도구’에 견줘 ‘생명 있는 도구’라고 말했던 것을 연상시킨다. 그와 전태일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노예주인 아리스토텔레스는 현실을 긍정했으나 노예인 전태일은 현실을 부정했다는 점이다.

“내가 보는 세상은, 내가 아는 나의 직장 나의 행위는 분명히 인간 본질을 해치는 하나의 비평화적, 비인간적 행위다. 하나의 인간이 하나의 인간을 비인간적인 관계로 상대함을 말한다. 아무리 피고용인이지만 고용인과 같은, 가치적으로 동등한 인간임엔 추호의 차이도 없기 때문이다. 인간을 물질화하는 세대, 인간의 개성과 참 인간적 본능의 충족을 무시당하고 희망의 가지를 잘린 채 존재하기 위한 대가로 물질적 가치로 전락한 인간상을 증오한다.”

전태일에 대해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요구를 위해 귀중한 목숨 바쳤다고 평가한 사람들은, 위의 글을 음미하고 자신의 생각을 수정해야 한다. 전태일이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보내려다 만 진정서에 적혀 있는 “하루 10~12시간으로 작업시간 단축”이나 “일요일마다 휴일로”라는 요구는 얼핏 보면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요구일 뿐이다. 하지만 그 안에는 노동자는 말할 줄 아는 도구인 노예가 아니라는 현실 부정의 사상이 밑바탕을 이루고 있다.

그와 같은 노예제적 현실은 현 체제가 이데올로기로 포장하는 것과 다르게 맥아더가 1945년 9월 자신의 부하들을 이 땅에 진주시키면서 포고령으로 선포한 세상, 박정희 정권이 군사쿠데타로 강요한 세상의 실제 모습이었다. 전태일은 그런 거짓되고 악한, 저주받아야 할 불합리한 현실을 타파하고자 했다. 사회의 지배구조를, 뭉친 덩어리를 분해하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되면 사회는 덩어리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또한 부스러기란 말이 존재하지 않을 걸세.”

“한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인간적인 모든 것을 박탈당하고 박탈하고 있는 이 무시무시한 세대에서 나는 절대로 어떠한 불의와도 타협하지 않을 것이며 동시에 어떠한 불의도 묵과하지 않고 주목하고 시정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박정희 정권은 노동자·민중에게 ‘조국 근대화’라는 비전을 제시했다. 조국이 근대화돼야, 자본이 축적돼야, 파이가 커져야, 마이 카 시대가 오고 민중이 잘 먹고 잘사는 좋은 세상이 온다고 했다. 그때까지 허리띠를 졸라매고 참고 견뎌야 한다고 했다. 돈과 권력을 가진 자들은 물론이고 많은 지식인들이 이 비전과 전략에 동조했다. 그러했으므로 월남파병도, 한일 수교도, 6·8 부정선거도, 제3별관 삼선개헌도, 10월 유신도 그럭저럭 관철됐다.

가진 자들은 어떻게 자신들의 전략을 관철시켰나. 테러독재 즉 파쇼통치를 통해서였다. 반공법·국가보안법·특별조치법·긴급조치가 헌법 위의 법률로, 중앙정보부가 국가 안의 국가로 군림했다. 그래도 안 되면 위수령과 계엄령을 발동하고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다. 그러나 파쇼 체제도 오로지 채찍만 가지고 민중을 지배할 수는 없다. 당근 책략이 필요했다. 노동자·민중도 자본가를 닮아서 인간의 가치나 희망과 윤리 같은 것은 내다 버리고 오로지 자신의 금전대의 부피를 키우는 것을 추구하라고 부추기고, 민중의 물질적 욕망을 조금씩 충족시켜 주는 것이다. 그래서 전태일은 이 세상의 만인들에게 촉구했다. 이 체제의 사악한 선동에 포섭되지 말고 사람이 생명 있는 도구가 아니라 세상의 주인으로 사는 참 세상을 만드는 역사적 사업에 떨쳐나서라고. “인간을 필요로 하는 모든 인간들이여, 그대들은 무엇부터 생각하는가? 인간의 가치를, 희망과 윤리를, 아니면 그대 금전대의 부피를?”

그런데 파쇼에 반대한 민주정부도 자신의 존재이유를 물질적 욕망 충족에 뒀다. 노무현 정권은 7% 경제성장을 공약했다. 진보를 자임한 부분도 성장보다 분배를 강조했을 뿐 물질적 욕망 충족을 중심 가치로 인정했다. 그리하여 독재세력과 민주세력 사이에 누가 그런 욕망을 더 잘 충족시키느냐 하는 차이만 중요하게 됐다. 그것이 민주화 이후 반민주적인 이명박·박근혜 정권의 등장을 가능하게 했다. 이명박 정권은 747을, 박근혜 정권은 474와 경제민주화를 비전으로 제시했다. 국민은 이들을 선택했다. 그들이 부정과 부패를 범하고 독재를 자행했다는 것을 모르지 않지만 물질적 욕망을 더 잘 충족시킬 거라고 기대했기 때문이다. 물론 부정 투개표로 당선이 조작됐을 거라는 점을 부정하지 않지만 말이다.

우리 노동자는 지금 45년 전과 똑같이 파쇼정권의 통치 아래 신음하고 있다. 왜 그 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지, 우리 자신의 의식과 실천에 대한 깊은 성찰이 필요한 시점이다. 전태일의 외침을 잊은 것, 물질적 욕망 충족의 대가로 임금노예로 전락하는 데 굴종해 온 것, 인간성을 포기해 온 것, 그의 죽음을 헛되이 해 온 것, 바로 그 인간성 포기가 문제였다.

전태일을따르는사이버노동대학 대표 (seung7427@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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