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승인가? 사람인가? 손배소 참여로 사람이 되자!

짐승인가? 사람인가? 손배소 참여로 사람이 되자!

(이 글을 읽고 늘 짐승이 되지 않기 위해 고민하고 번뇌하는 진정한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길 고대할 뿐입니다.)


짐승이란? 네 발로 기어 다니는 포유 동물을 말한다. 우리는 보통 그 대표 동물로 ‘개’를 얘기한다. 우리 생활 속에서 가장 밀접하게 지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는 짐승이란 어떤 동물인가를 가장 잘 인식시켜 준다고 말할 수 있다.


불교에서 개에게도 불성이 있는가? 라는 질문이 있다고 한다. 교회를 다니는 나도 그 답은 불성이 없다! 라고 답을 할 것이다. 불성이란 기독교적으로 성령일 것이다. 땅만 보고 사는 개에겐 당연히 불성이란 것은 없는 것이다.


짐승은 네발로 다니지만 사람은 두 발로 서서 다닌다. 그러니 사람과 동물은 우선 보는 범위와 지향 점이 다르다. 네 발의 짐승은 거의 대부분 땅만 보고 다닌다. 하지만 사람은 땅도 보고 하늘도 쉽게 볼 수 있다. 네 발로 다니며 하늘을 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직접 기면서 하늘을 보면 그 어려움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니 하늘을 보는 사람과 땅만 보게 되는 짐승은 생각의 차원이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땅만 보며 살 수밖에 없는 몸의 구조를 갖고 있는 짐승은 그렇게 짐승다운 생각과 행동을 할 수 밖에 없게 되니 그런 행동을 죄라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살도록 구조화 돼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의 구조는 땅과 하늘을 같이 볼 수 있으니 하늘의 가치를 더하여 생각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 가치를 모르거나 무시한다면 생김새는 두 발로 걷는 사람이지만 행동과 생각은 네 발의 짐승이 되는 것이다.


모습은 사람이지만 죽을 때까지 하늘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살다가 죽는 사람들이 부지기 수이다. 그런 사람들은 모습은 사람이었으되 결국 짐승으로 살다가 가는 사람인 것이다.


하늘의 뜻이란 별개 아니다. 불성 또는 하나님의 뜻 이라는 말로 표현을 하니 어렵게 들리는 것이다. 이를 정의 또는 양심이란 단어로 표현하면 아주 쉬어진다는 것이다. 정의란 진리에 맞는 올바른 도리라고 풀이할 수 있다. 즉 사람은 늘 올바른 게 무엇인가 생각하고 고민하고 번뇌해야 하는 동물인 것이다. 이런 본성을 갖고 있기에 바르지 못한 행동을 하게 되면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다는 말을 하게 되는 것이다.


동물은 먹거리가 있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이를 차지하기 위해 잔인한 행동들을 서슴지 않는다. 이런 행동에 고민과 번뇌를 하지 않는다. 좋게 말해 본능에 충실하다고 표현을 하지만 그저 씁쓸한 모습인 것이다.


동물의 먹거리와 사람들의 돈과 주식과 각종 증권과 권력이 무슨 차이가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정확하게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같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교육이 문제인 것은 이런 먹거리 확보를 위한 즉 생업 만을 위한 교육 시키기에 주력하기 때문인 것이다. 원래 교육은 하늘의 뜻 즉 정의가 무엇인지 알게 해 주는 과정이어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특히 우리나라에 와선 짐승적 생존 기술을 익히는 과정으로 심하게 변질돼 있다는 것이다. 출세키 위해 받는 게 교육이 돼 버렸으니 앞날이 좋을 리 없는 것이다.


짐승도 자기 새끼가 살아가야 할 기본적인 방법들을 전수한다. 즉 생업 기술들을 전수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사람이야 더 오죽하겠는가! 육체적 생존의 생업기술 전수는 물론인 것이다. 이에 더불어 사람은 자기 자식에게 정의로운 생각과 행동의 방법을 전수해야 하는 것이다. 이를 기독교는 하나님의 자식이 되는 길을 알려준다고 표현을 하는 것이다.


사람과 짐승의 차이점을 지적인 의미에 한정한다면 개와 돼지의 차이점을 사람과 짐승의 차이점 정도와 같다고 얘기한다면 틀리는가? 그렇기에 지적인 차이를 두고 사람과 짐승의 차이를 두는 결정 요인이라고 말하면 안 되는 것이다. 사람과 짐승의 차이는 그렇기에 정의 즉 하늘의 뜻을 생각하며 양심에 근거하는가에 있다는 것이다.


직장에 다니며 먹고 살기 위해 성실히 일한다면 이는 짐승 수준인 것이다. 처와 자식을 위해 열심히 일한다면 이 또한 짐승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주식을 하며 돈을 벌기 위해 열심히 경제 공부를 한다면 이 또한 먹거리를 확보하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짐승과 같은 차원이라는 것이다. 지식에 머무르고 지혜로 넘어가지 못한다면 이 모든 게 다 짐승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짐승들도 우리가 갖지 못한 무수히 많은 기능과 기술들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개의 청각과 냄새 맡는 능력이 뛰어나다 하여 우린 이를 사람처럼 능력이 있다고 말하진 않는다는 것이다.


정의를 실현키 위해 하는 행동들을 짐승 수준의 사람의 차원에서 보기를, 그 모든 게 먹거리를 확보키 위한 행동으로 해석하고 이에 쉽게 동의하고 경도되는 자신을 되돌아 보면서 자신의 사람돼지 못함을 반성한 적이 있는지 생각해 보라! 이는 곧 아름다운 꽃을 보며 아름답다 하지 못하고 가격으로 환산하기에 바쁜 행태와 같다고 할 것이다.


금번의 손해배상 청구는 그 정신적 피해에 해당하는 2,30만원의 돈을 받기 위해 하는 행동은 아닌 것이다. 이는 곧 피해를 당한 우리 노동자가 스스로 짐승이 아니요 사람임을 확인하기 위한 과정일 것이다. 이 때 돈은 그 수단으로 활용되는 것 뿐이다. 이렇게 정의를 실현하자는 데 일부 노동자들은 아직도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결과적으로 겉 모습은 사람이지만 결과는 짐승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게 참으로 안타깝다는 것이다.


사람과 짐승의 차이란 곧 정의를 실현키 위한 고민과 번뇌와 행동을 할 줄 아느냐 모르느냐의 차이라는 것이다.


땅에서 태어나는 것으로 끝나지 말고 하늘로부터 다시 태어나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한 번 육체적으로 태어나는 것에 그치면 안 되고 다시 두 번째의 태어남 즉 하늘로부터 또 태어나는 과정을 겪어야 하는 것이다. 이 두 번째 태어남을 깨달음이라 표현하며 부활이라고도 표현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아래로 한 번 태어나고 위로부터도 한 번 더 태어나야 완성되는 것이다. 특히 기독교에선 육체적 부모님만 생각하지 말고 위로부터 태어남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도록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아버지라면 우린 모두 형제일 수밖에 없을 것이니 내 이웃과 원수도 결국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시키는 대로 열심히 성실히 직장생활 하는 것에 그친다면 그리고 오직 처와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감내만 하고 참는다면? 이는 짐승 레벨인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모든 짐승들도 마찬가지로 이런 행동들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단지 그 방법과 양식만 다를 뿐인 것이다.


자! 우리 모두 사람이 됩시다! 정의를 실현키 위한 실천만이 당신을 진정한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게 할 것입니다. 지금의 삶이 굴욕적이라면 이는 곧 모습은 사람이면서 짐승의 삶을 사는 것에 대한 본능적 반발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이를 다 같이 동시에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기회를 마련 해 줬다면 이를 실천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멍석을 깔아 줬는데도 하지 못한다면 그 이후에 밀려 올 그 굴욕은 결국 당신의 몸과 마음을 썩게 만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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