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급질서 자체에는 관심 없고 사소한 부정에 화내는 한국인들

‘진짜 좌파’가 날리는 둔중한 레프트 훅

등록 : 2014.12.18 21:06수정 : 2014.12.18 21:36

 
2000년 11월7일 러시아혁명 83돌을 맞이하여 모스크바크레믈(크렘린)궁 근처에서 공산당 지지자들이 행진하는 모습. AP 연합뉴스

계급질서 자체에는 관심 없고
사소한 부정에 화내는 한국인들
커다란 군부대인 대한민국에서
통합진보당은 시범케이스일 뿐
좌파는 ‘심장없는 사회의 심장’ 돼야

비굴의 시대
박노자 지음/한겨레출판·1만7000원
 

박노자의 새 책은 왼쪽에서 달려온다. 식민지와 분단, 고도성장과 신자유주의를 거치며 ‘진짜 좌파’가 거세되다시피 한 한국 사회에서 접하기 어려운 시선이다. 2009년부터 최근까지 블로그에 쓴 글을 모아놓은 것이지만, 세월의 풍화작용에 아랑곳않고 퍼런 날이 서 있다. 긴장감 유지의 비결은 일관된 사회주의 신념이다.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뤘다는 “대한민국의 공식 스토리”에 대해 그는 “우리는 민주화를 이룬 적이 없다”고 반박한다. “군부가 독점해온 권력을 재벌의 돈으로 먹고사는 보수 정치인들이 나누어 갖게 되었으며, 두 보수 정당 간의 평화적 권력 교체 시스템이 작동한 것이다. 말하자면 군부가 비운 자리에 결국 재벌의 마름들이 들어앉은” 데 불과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박근혜 대통령 당선은 파쇼의 부활이 아니라 이 사회 안에 늘 내재해 있는 파시즘적 요소의 강화에 불과하다고 그는 본다. 그 예로 통합진보당 위헌심판을 든다. 그는 “‘이석기 사태’의 본질은 궁극적으로 그가 우리 부대의 ‘적’을 적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우리 부대가 벌이는 총성 없는 전쟁에 대해 독자적 판단을 한 점”이라며 “커다란 군부대인 대한민국에서 이러한 경우는 죽을 죄보다 더한 것”이라고 말한다. 더구나 통합진보당은 시범케이스일 뿐이다. “노동당이 출마해서 통진당 정도의 정치적 지분을 얻게 된다면 노동당도 통진당과 마찬가지로 체제에 의한 말살 작전의 대상이 될 것이다. 이석기 재판처럼 무식한 마녀사냥을 통해서든, 좀 더 지능적으로는 교사 당우(黨友) 해고와 같이 일부 당원에 대한 표적 사냥을 통해서든, 그 방법은 다양하지만 목표는 똑같다.”

박노자 오슬로대 한국학과 교수(아래)는 레닌주의적 사회주의가 미국과의 체제 경쟁에 몰두하느라 사회주의의 본령인 인간의 행복을 놓쳤다고 비판한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진짜 좌파가 보기에 한국의 이념 지형은 우습기 짝이 없다. 한국의 우파들이 “좌파” “빨갱이”라고 부르는 박원순은 “양식있는 중도보수”고, 김대중은 “우파적 자유주의자”에 불과하다. 그런데 왜 우파만이 아니라 야당 지지자들의 눈에도 “문(재인)이나 안(철수)보다 왼쪽에 있는 사람은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일까. 여기서 그는 마르크스의 표현을 빌려 좌파의 현실을 적시하면서 나아길 길을 제시한다. 한국의 정치적 좌파가 존재감이 없는 것은 “심장 없는 사회의 심장이 되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 좌파는 당분간 담론에 매달리기보다는 떡볶이 아주머니, 편의점 아르바이트생, 비정규직 노동자가 있는 현장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러시아에서 태어나 한국 국적을 취득했고, 노르웨이 오슬로대학에서 교수로 살고 있는 디아스포라로서, 또한 비타협적인 사회주의자로서 그는 사회정의에 대한 한국인들의 통념에 직격탄을 날린다. 그가 보기에 한국인들은 “삼성 이재용 전무(현 부회장) 한 명이 수만 명의 중산층 한국인보다 훨씬 더 많은 부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는 당연시하지만, 만에 하나 그가 자녀를 기부입학과 같은 방법으로 서울대에 보내려 한다면 상당히 분노한다.”(이 대목은 예언처럼 들린다. 실제로 몇 년 뒤 이재용 부회장의 아들이 영훈국제중학교에 특혜입학했다는 의혹으로 여론의 지탄을 받아 학교를 그만뒀다.) 사회의 기본 구조를 결정하는 “계급 질서 자체”에 대해서는 관심 없고 “그것에서 파생되는 비교적 사소한 부정”에 대해서는 화를 낸다는 것이다. “이 나라 대다수 선남선녀는 그들(삼성 같은 재벌)을 착취자가 아니라 실업계의 거두로 바라본다. 국가는 통제 메커니즘이자 착취를 위한 행정기구가 아니라, 그저 ‘우리나라’다. (…) 사회주의자의 시각에서 보면 대한민국의 평균적 국민이 생각하는 사회적 정의란 억울하고 우스운 것이다.” 심지어 부당해고에 맞서 싸우는 노동자조차 “부당한 해고를 가능하게 한 구조 자체와 싸우지 않는다.”
 

왜 우리는 시인 김수영의 개탄처럼 “사소한 것에만 분노하”게 된 것일까. 박 교수는 “사회뿐만 아니라 개개인이 모두 신자유주의화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나 홀로 작은 자본가가 되어 몸값을 높여 노동 시장에 팔거나 상호 경쟁에 몰두”하느라 “연대 투쟁은 그저 귀찮은 일일 따름이다.” 국민 모두가 ‘수평적 이해관계’와 ‘수직적 권력관계’의 먹이사슬에 얽혀 갑을병정으로 서로 먹고 먹힌다. “대한민국의 평범한 젊은이들은 매 순간 낙오의 공포를 느낀다. 사회운동에 대한 무관심, 약자에 대한 배려의 절대적 부족 등 젊은이들의 상당수 고질은 바로 여기에서 파생된다. 북한에서 수령님의 초상화를 우연히 잘못 건드린 사람이 평생 한 번 느낄까 말까 한 공포는, 대한민국에서 성공하지 못한 혹은 평생 성공할 확률이 낮은 사람이 매 순간 느끼는 공포에 비하면 아마도 약과인지도 모른다.”
 

대안은 “이윤 위주에서 사회 정책 위주로 획기적으로 바꿀, 계획경제 요소를 대대적으로 도입하는 것”이다. “주요 대기업, 은행, 교육, 의료 같은 주요 부문을 사회화함으로써 사회적 격차를 줄이는 데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무엇보다 친환경 에너지를 개발하여 석유와 가스 소비를 대체하고 탈핵을 모색해야 한다. 또한 농업 발전에 사회의 모든 자원을 집중하고, 비정규직을 정규직화하며, 저임금 노동자의 임금은 대대적으로 인상하여 내수의 기반을 다져야 한다.”
 

이 책이 그 대안을 이룰 방법을 구체적으로 밝히지는 않는다. 선거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밝히는 정도다. 착취 구조에 대한 전면적 저항을 강조하면서 그는 스스로 이렇게 다짐한다. “자본주의가 필연적으로 인간을 왜곡하고, 장기적 차원에서는 다수를 절대적이거나 상대적인 빈곤으로 빠뜨리며 결국 위기, 공황, 전쟁을 낳는다는 것은 진리다. 나는 그냥 저들이 내 입을 힘으로 막을 때까지 그 진리를 크게 이야기할 생각이다. 그렇게 해서 파쇼들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후손들에게 부끄럽지는 않을 것이다.”
 

이재성 기자 s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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