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운동에 대한 자기성찰

낮은 곳으로 흐르는 물처럼 찾아드는 “하방연대”


 

1. 인문학의 성찰

모든 이론과 실천의 출발점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다. 한 개인의 삶에 있어서든 또는 사회운동에 있어서든 모든 사람은 자신의 정체성에 기반하여 이론을 조직하고 실천을 영위한다. 노동운동에 있어서 가장 취약한 부분 역시 이 정체성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무엇이며 우리는 어떤 삶을 지향하여야 하는가? 이러한 것을 총체적으로 사고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인문학적 관점이다. 인문학은 사람과 삶을 중심에 두고 과거 현재 미래를 아우르고 변화와 창조를 지향한다. 그런 점에서 인문학은 모든 시대가 갇혀 있는 문맥(文脈)을 깨닫고 벗어나는 최고의 성찰적 관점을 보여준다.

자신의 온당한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갇혀 있는 문맥으로부터의 탈피와 결별이 요구된다. 그것은 지배이데올로기를 벗어난 주체적 인식틀을 확립하는 것이기도 하다. 현 단계 노동운동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가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조직화 비율과 층위가 낮고 그나마 내부갈등이 구조화된 상태이다. 그리고 객관적 상황 역시 매우 어렵다. 97체제에 이어 2007체제는 더욱 열악한 객관적 조건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 가장 절실한 것이 바로 인문학적 성찰성이다. 독서는 먼저 텍스트를 읽고 다음 그 텍스트의 필자를 읽고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독자 자신을 읽는 삼독(三讀)이다. 성찰은 자신의 정체성과 자신이 맺고 있는 광범한 관계망에 대한 넓은 관점을 세우는 것이다

 

2. 희망의 언어 석과불식(碩果不食)

역경(逆境)을 극복하는 옛사람들의 지혜는 ‘석과불식’이다. 석과불식은 한 알의 씨앗을 새싹으로, 나무로, 드디어 숲으로 키워내는 희망의 언어이다. 이것은 먼저 잎사귀를 떨고(葉落), 구조를 직시하는(體露) 것에서 시작한다. 엽락과 체로가 곧 성찰이다.
그리고 뿌리를 거름하는(糞本) 것, 그것이 곧 희망의 건설이다. 씨과실(碩果)을 먹지 않고 이듬해 봄에 새싹으로 키워내는 것이 희망이다. 새싹이 나무로 그리고 숲으로 가는 긴 여행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뿌리(本)는 곧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우리가 거름해야 하는 것은 소외된 인간적 가치이다. 인간은 결코 다른 어떤 가치의 하위(下位)개념일 수 없기 때문이다. 성찰은 바로 인간에 대한 주목이다.
사물(事物) 사건(事件) 사태(事態)에 대응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이다. 실사구시(實事求是) 방식과 진리(眞理) 방식이 그것이다. 실사구시적 방식이 방법론 차원의 대응임에 비하여 진리방식은 근본적 개념을 재구성하는 대응이다. 바로 인간의 실존과 정체성에 대한 근본적 성찰을 의미한다. 희망의 건설은 바로 인간에 대하 성찰을 중심에 두는 진리의 문제이다.

3. 인간과 인간관계

 
공자의 지(知)는 지인(知人)이다. 진정한 지(知)란 인간에 대한 이해이다. 인간에 대한 이해가 없는 사회는 무지한 사회이다. 인간의 정체성이 실종된 사회이다. 화폐가치라는 단 하나의 가치로 환원된 사회에서는 인간의 정체성이 소멸된다. 사람의 소중함, 인문학적 가치가 사회적으로 실종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 뿐만 아니라 인간관계가 황폐화되어 있다. 맹자의 이양역지(以羊易之)의 핵심적 의미는 ‘만남’이다. <만남>과 <관계>가 황폐화되는 사회적 구조는 인간의 정체성 소멸에 이어 사회성의 붕괴를 의미한다. 사회의 본질이란 인간관계의 지속적 질서이기 때문이다. 상품문맥, 화폐문맥 나아가 우리가 갇혀 있는 근대문맥의 탈피가 당면과제가 된다.
 

4. 근대문맥과 탈근대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 데카르트의 선언은 근대사회의 핵심적 원리이다. 이성과 합리성을 선언한 혁명적 근대의 탄생을 상징한다. 그러나 근대사의 전개과정은 자연을 대상화(對象化)하고 인간을 타자화(他者化)하는 ‘동일성(同一性) 논리’와 ‘동(同)의 논리’로 점철되었다. 바야흐로 탈근대를 모색하는 현대철학의 주제는 주체(主體) 대상(對象) 진리(眞理)에 대한 근대적 사유의 근본적 성찰이다.

논어의 화동(和同)담론은 근대사회의 구조를 드러내는 관점을 보여준다. 화(和)는 차이와 다양성을 승인하는 평화와 공존의 원리이다. 반면에 동(同)은 흡수와 지배를 통한 ‘자기 동일성(同一性)’의 논리이다. 근대사회의 존재론적 논리이다.

그러나 화동담론에서 우리가 주의해야 하는 것은 진정한 화(和)는 단순한 차이의 승인과 공존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차이를 존중하고 다양성을 승인하는 관용(tolerance)이 근대사회가 도달한 최고의 사회원리이다. 그러나 관용은 타자의 동일성을 승인하는 동시에 자신의 동일성을 관철하려는 것이라는 점에서 동(同)의 논리를 뛰어넘지 못하고 있다. 진정한 화(和)는 ‘자신이 변화하는 것’이다. 차이와 다양성은 다만 공존의 대상이 아니라 자신이 변화할 수 있는 반갑고 감사한 기회이다. 변화와 탈주(desertion) 그리고 탈영토(脫領土)의 유목주의(nomadism)가 탈근대의 문명사적 과제이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소수자 되기(becoming minority)이다. 변방은 역사적으로 다음 단계의 중심지가 된다. 다만 변방이 중심부에 대한 컴플랙스를 청산하고 있어야 함은 물론이다


5. 상선약수(上善若水)

최고의 선(善)은 물과 같다. 물은 가장 약한 존재이면서 동시에 최선(最善), 최강(最强)의 의미로도 읽힌다. 『노자』는 부국강병이라는 ‘신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던 춘추전국시대에 민초들이 어떻게 대응하고 실천할 것인가에 관한 귀중한 담론으로 읽힌다. 약한 물이 강고한 것을 이기는 힘은 낮은 곳으로 하는 물의 특성에서 찾는다. 낮은 곳으로 향하는 물의 이러한 특성 때문에 물은 반드시 모이기 마련이며 드디어 바다에 이른다는 것이다. 물의 철학은 한마디로 하방지향(下方指向)의 연대성이다. 그리고 이러한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자신의 변화이다. 시내가 되고 강이 되고 바다가 되는 자신의 꾸준한 변화이다.

강한 것, 높은 곳을 지향하는 것은 연대가 아니다. 그것은 추종과 타협이다. 결국 흡수 합병으로 귀결될 뿐이다. 노동운동의 연대방향도 마찬가지이다. 정치권력이나 자본이 아님은 물론이며 대기업보다는 중소기업, 상대적으로 약한 지위에 있는 여성노동자, 하청현장, 비정규직, 실업자, 농민, 빈민 등을 지향하는 하방연대이어야 한다. 하방연대는 민중적 역량을 결집하는 틀이다.


6. 노동자와 연대

잉여가치는 물론 노동이 창출한다. 한 사회의 물적 토대는 노동에 의하여 만들어진다. 그런 의미에서 노동가치설은 진리이며 노동자는 필요노동시간을 초과하는 잉여노동에 의하여 잉여가치를 생산하고 있으며 잉여가치는 자본이 영유한다. 그런 점에서 노동자는 일차적 피수탈자이다. 그러나 우리가 유의해야 하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의 가치는 ‘교환가치’라는 사실이다. 생산된 가치는 팔리지 않으면 그 가치가 실현되지 않는다. 생산된 잉여가치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목숨을 건 도약’을 해야 한다. 팔려야 한다. 이 목숨을 건 도약은 우선 팔린 것으로 간주하게 해주는 신용(信用)에 의하여 은폐된다. 신용제도는 도약에 실패한 자본에 대하여도 그 축적과정을 보장한다. 뿐만 아니라 신용제도는 창출된 잉여가치를 실현된 가치로 인식하게 하는 장치로도 작용한다. 이러한 장치로 말미암아 우리는 창출된 가치가 곧 실현된 가치라고 생각한다. 가치는 시간적으로 판매이전의 생산단계에서, 공간적으로 작업장 내부에서 생산물에 응고되어 있는 것으로 인식한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창출된 잉여가치의 ‘실현공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수탈당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수탈당할 수 없는 열악한 처지에 놓인 사람도 존재한다. 이와 같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부당한 희생을 감수하는 모든 공간의 모든 사람들과 연대하지 않고 노동가치설에 의하여 자기정체성을 배타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연대의 자세가 아니며 약한 자의 전술이 아니다.


7. 신뢰집단의 건설

연대문제는 관계건설의 문제이며 관계건설의 핵심적인 고리는 신뢰성이다. 연대문제의 사회적 과제는 신뢰집단을 건설하는 일이다. 연대의 층위와 수준은 결국 신뢰집단의 성격과 직결되는 것이다. 우리사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신뢰집단의 부재이다. 정치, 언론, 사법, 교육, 종교, 관료, 기업 등을 비롯하여 사회적으로 신뢰집단이 없다는 것은 연대의 핵심 고리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개별 집단이 각각 자기의 신뢰성을 세워나가야 하는 것도 부담이지만 타 집단의 불신을 통하여 자신의 신뢰를 선언하거나 방어하고 있다는 점에서 결국 사회적 역량의 거대한 소모를 동반한다.

운동관점에서 볼 때 신뢰구심이 부재한 상황은 중앙과의 연결이 단절 된 파르티잔의 상황과 다르지 않다. 이러한 상황에 대한 역사적 교훈의 핵심은 민주주의이다. 주민과의 접촉국면을 확대하는 것이다. 광범한 접촉국면 민주주의를 담보하면서 동시에 신뢰집단의 건설기초를 담보한다. 파르티잔 전술에서 주민이 전투력의 보급원이라는 사실은 차라리 부차적이다. 중요한 것은 민주주의이다. 주민들과의 정치적 목표를 공유하는 정치적 민주주의이다. 노동운동의 당면 과제는 민주주의의 문제이다. 민중과 정치목표를 공유하는 민중문제이고 동시에 그 목표의 민주적 공유이다. 민중의 지근거리(至近距離)에 진지(陣地)를 만드는 것, 그리고 근거지로 하여 신뢰를 구축해 가는 것 즉 민주주의와 정치목표의 공유가 연대의 핵심을 이룬다. 중앙을 지향하는 기회주의적 작풍은 엄중히 반성되어야 한다.



8. 이론(理論)과 실천(實踐)

사람은 기본적으로 보수적이다. 자신의 생존이 결정적으로 위협받지 않으면 절대로 판 자체를 바꾸려고 하지 않는다. 현실과 인간에 대한 이해를 현실화해야 한다. 더구나 욕망(慾望)이 사회 구조화되어 있고, 정치적 보수구조가 역사적으로 완고하게 구축되어 있는 현실적 조건에서는 변혁운동의 간고성(艱苦性) 장기성(長期性) 굴곡성(屈曲性)을 전제하여야 한다. 실천의 현실적 조건은 매우 열악하다. 따라서 관념적으로 선취된 목표를 현실에 이식하려는 모든 노력은 실패하지 않을 수 없다. 이상주의적 모델로부터 당면의 현실적 과제를 내려 받는 전도된 구도는 청산되어야 한다. 이론은 비타협적이고 급진적일 수 있으나 실천은 현실의 조건 속에서 수많은 시행착오를 통하여 진행되지 않을 수 없는 법이다. “이론은 좌경적으로 하고 실천은 우경적으로 해야 한다.”


9.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여행

운동은 양심에서 시작되고 양심으로 지탱되어야 한다. 양심적 동기에서 참여한 사람들은 그 길을 바꾸지 않는다. 양심은 이웃에 대한 관심이며 애정이다. 이념적 지향보다는 이웃에 대한 인간적 애정이 끈질긴 저력이 된다. 그리고 그 자체로서 철학이 된다. 양심은 강철이 아니라 연약하지만 바람 속에서도 다시 일어서는 풀이다. 바람보다 먼저 눕지만 바람 속에서 다시 일어서는 풀이다.

논리적인 주장보다는 인간적 애정으로 포옹하는 작풍이 감동을 준다. 논리 정합적 주장의 전개는 논쟁적이 되기 쉽고 소모적인 사투(思鬪)로 이어지는 경향을 띠지 않을 수 없다. 논쟁 그 자체, 회의 자체가 실천이 되는 역전된 구조가 된다.

냉철한 이성(cool head)보다는 따뜻한 가슴이 더 중요하다. 우리의 판단과 사고가 이루어지는 곳은 우리의 두뇌가 아니라 가슴이다. 우리는 ‘가슴에 두 손을 얹고’ 반성한다. 일 한다는 것은 인간관계를 만들어 나가는 일이며 그것은 ‘따뜻한 가슴’으로 할 것이다.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먼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여행’이다

10. 근로인텔리의 사회적 탄생

“노동계급의 승리는 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 사회 전체에 대한 노동계급의 헤게모니가 성취될 때에만 보장될 수 있다. 이것이 혁명 전략의 핵심과제이다.”

한 사회의 지식 담당계급을 바꾸는 일. 이것이 최종적으로 그 사회를 바꾸는 일이다. 사회변혁은 사상투쟁으로부터 시작하고 사상투쟁으로 끝난다. 사상투쟁은 초기단계에서는 밑그림이면서 최종단계에서는 콘크리트를 굳히는 거푸집이다. 근로인텔리 계층이 형성되어야 한다는 것은 이러한 이론적 체계가 근로계급내부에서 주체적으로 생산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각국의 역사적 경험에서 우리가 얻어야 하는 교훈은 모험주의, 기회주의, 수정주의 등 여러가지 오류들이 바로 사상의 불철저성에 기인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불철저성이란 지식체계가 계급적 토대에 기반을 두지 않고 개인의 독창성에 의존하거나 특정 이론을 교조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야기된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물론 사상과 이론의 지도성을 개인 또는 특정 이론에서 구할 수도 있다. 그리고 지식인은 계급을 선택하는 계급인 것도 사실이며 수많은 실천가들이 자기의 계급을 뛰어넘은 역사적 사례도 얼마든지 있다. 따라서 사상을 계급 밖에서 구할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실천적 경험과 변혁적 지향성이 배제되는 경우 사상은 필연적으로 관념적이 된다. 이 과정에서 바로 각종의 오류가 싹트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론과 실천의 통일이며 이론과 실천의 통일은 이론과 실천의 전 과정이 동일한 계급에 의하여 일관되게 장악되는 구조를 가질 때 비로소 가능하게 된다. 실천의 담당자가 이론의 담당자가 되어야 한다. 문화예술에 있어서의 전위성(前衛性)이 개인적 천재에 의존하는 것과는 달리 사회변혁은 어느 개인의 전위적 천재에 그 사상을 의존할 수 없다. 사회변혁은 어떤 경우에라도 실험적인 형식을 취할 수가 없으며 변혁운동 그 자체가 삶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사회과학이 사회변화의 전망을 제한하는 경우 사회변혁의 담론은 학문의 영역으로부터 운동의 영역으로 옮아가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뿐만 아니라 학문적 영역은 사회변혁을 이끄는 역동성에 있어서 운동영역에 비하여 현저히 떨어지기 마련이다. 이것이 운동부문이 새로운 사상체계를 구성해가지 않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이유이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계급집단의 사상과 정서는 현실적 힘으로 작동한다는 사실이며 더욱 중요한 것은 운동에 기반을 둔 사상체계는 곧 삶의 현실적 내용, 사회의 질적 구조 그 자체를 구성한다는 사실이다.

패권주의적 자본주의 질서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비판보다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이 과도한 오늘날의 이데올로기적 공세로 말미암아 아직도 온당한 평가가 행하여지기 어려운 현실이지만 한 사회의 지식계급이 바뀌는 최초의 경험이 그 속에 있다는 점에서 그것은 역사적 사건이 아닐 수 없다. 근로인텔리의 탄생은 사회변혁운동의 필요조건이면서 동시에 충분조건이다. 그것은 사회의 이행전략을 입안하고 관리하는 집행기구의 탄생과 마찬가지의 의미를 갖는 것이기 때문이다


11. 내부연대로서의 공감과 애정

 부문운동 간의 연대문제에 비하여 놓치기 쉬운 것이 바로 운동진영 내부의 동지적 연대문제이다. 이것은 동지들 간의 인간적 애정과 공감과 신뢰의 문제이다. 이 내부연대의 문제 역시 기본에 있어서는 연대문제이다. 따라서 내부의 동지적 연대도 원칙적으로 운동진영간의 연대와 마찬가지로 하방(下方) 지향적이어야 한다. 하방 지향이란 상급자나 선배들로부터 신뢰받기보다는 후배와 하급자들로부터 신뢰를 받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개인의 능력과 그 능력에 대한 평가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로부터 신뢰를 받고 있는가에 의하여 결정된다.

사람은 능력을 평가하기는 지극히 어렵다. 이 지극히 어려운 일을 가장 쉽고 정확하게 처리하는 방법이 바로 인간성으로 평가하는 방식이다. 조직력, 설득력, 논리성 등 운동가로서의 직업적 능력이 특히 초기단계에서 돋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러시아 혁명과정에서 등장한 화려한 스타들의 특징은 회의를 통해서 등장하였다는 사실이며 그것이 곧 문제로 드러났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계파를 만들어 힘을 실으려 하거나, 권력이 있는 직책을 맡고 그러한 자리를 지키려고 하는 상방(上方)지향적인 작풍이 청산되지 않는 한, 변혁운동은 권력연습의 아류를 벗어나기 어렵다. 그것은 근본에 있어서 보수적 퇴행이다.

조직내부의 연대와 동지적 애정은 당연히 하방연대로 나타나야 한다. 그러한 하방지향의 조직방식과 사업방식 그리고 투쟁방식을 개발해 내어야 한다. 하방 지향적 연대원칙은 더 진보적인 사람이 덜 진보적인 사람에게 양보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선진적이고 열성적인 활동가 중심으로 투쟁이 조직된다는 것이 결코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상대적으로 덜 진보적이고 상대적으로 취약하고 또 상대적으로 미온적인 사람은 양보할 것이 없고 양보할 수가 없다. 이것은 운동부문내의 동지적 문제이면서 동시에 광범한 사회적 연대와 대중성을 키워가기 위한 원칙문제이기도 하다. 조직내부에 있어서 동지들 간의 연대문제가 제자리를 잡지 못한다면 부문운동 간의 연대문제가 옳은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법이다.

결론적으로 연대가 비록 역량이 취약한 경우의 전술전략이라고 하더라도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은 연대는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표이며 삶의 가치라는 사실이다. 연대는 사람과의 사업이기 때문에 곧 삶의 내용이며 그렇기 때문에 연대는 또한 신뢰이며 사랑이다. 그리고 21세기의 문명사적 전망성을 담보하고 있기도 하다.

12. 삶은 공부(工夫)이며 여행이다.

 

삶은 도로(道路)를 달리는 것이 아니라 길을 걷는 것이다. 많은 사람과 함께 걷는 것이다. 도로는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이며 속도와 효율논리이며 자본의 논리이다. 길은 그 자체가 가치이다. 힘든 상황을 견디게 하는 것은 목표의 달성이 아니다. 과정의 아름다움이다. 삶은 여행이며 공부이다.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여행은 또 하나의 먼 여행인 “가슴으로부터 발에 이르는 여행”에 의하여 완성된다. 발은 현실이며 실천이며 삶이며 숲이다. 그리고 숲은 나무의 완성이다.이 긴 과정을 견디게 하는 것이 양심(良心)과 자부심(自負心)이다. 양심은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이다. 자부심은 자기(自己)의 이유(理由)로 걸어가는 것이다 .

 

출처 <성공회대학교 신영복 석좌교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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