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서운 명퇴 바람

6·25전쟁 이후인 1955년에서 1963년 사이에 출생한 베이비붐 세대 712만 명이 올해부터 본격적인 은퇴를 맞는다.
베이비붐 세대의 첫 주자인 1955년생이 민간 기업의 일반적 기준인 ‘만 55세 정년’을 적용받을 경우 올해가 퇴직
시점이 되기 때문이다. 이들은 그동안 한국 경제의 중추를 맡아 온 세대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의 대량 은퇴는 부동산·
주식 등 자산시장의 ‘대란’은 물론 국가 경제의 활력과도 직결되는 위기 요인으로 꼽힌다. 또한 이들의 은퇴 이후를
뒷받침해 줄 사회·경제적 시스템의 부실도 논란거리다. 이에 따라 뒤늦게 정년 기준을 만 60세로 연장하려는 움직임
까지 나오고 있다.

하지만 올해 정년퇴직을 맞는 베이비붐 세대가 실제로 얼마나 될지는 미지수다. ‘55세 정년’은 이미 문구상의 규정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요즘 정규직으로 55세에 정년퇴직을 하는 사례를 찾아보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최근 국세청이
2008년 퇴직자들의 퇴직 소득 원천징수 신고 현황을 분석한 자료를 보면 이런 현상은 분명하게 드러난다. 전체 퇴직자
256만5595명 가운데 한 직장에서 30년 이상 근무한 경우는 7610명으로 전체의 0.3%에 불과했다. 근속 연수가 20~30년인
퇴직자도 1만6495명으로 0.6%에 그쳤다. 10~20년인 퇴직자는 2.7%(7만9명), 5~10년은 9.6%(24만6726명)였다. 반면 근속
연수가 5년 미만인 퇴직자는 86.7%(222만4755명)를 차지했다. 평생직장 개념은 이미 오래전에 퇴색하고 빈번한 직장
이동과 상시적인 명예퇴직이 일반적인 것이다. 퇴직금으로 목돈을 챙기던 것도 이제는 옛말이 됐다. 퇴직 급여와 명예퇴직
수당, 퇴직연금 일시금 등을 모두 합쳐 1억 원 이상을 받은 사람은 전체 256만5595명 가운데 불과 2만6230명(1.02%)뿐이었다.

전문가들 ‘제2의 명퇴 붐’ 예상

‘베이비붐 은퇴 쇼크’ 소동은 확실히 핵심을 비켜나 있다. 진짜 문제는 이른바 ‘명퇴’로 직장을 떠난 조기 퇴직자들이다.
이제 명예퇴직은 많은 사람이 담담하게 받아들일 만큼 일상적인 일이 됐다. 최근에는 오히려 직원들이 적극적으로 명예퇴직을
요구하기도 한다.

2009년 12월 31일자로 역대 최대 규모인 5992명의 명예퇴직을 단행한 KT도 노동조합의 요구를 회사 측이 수용하는 형태였다.
위로금 등 명퇴 조건이 다른 업종에 비해 좋은 금융권도 명예퇴직을 선호한다. 작년 말 명예퇴직을 실시한 농협은 20개월치
급여를 명퇴금으로 지급했다. 신한은행은 24개월치 급여에 연령에 따라 특별 위로금으로 6개월치를 추가했다. 상대적으로
기회가 많은 40대의 경우 새로운 도전을 위한 종잣돈을 마련할 수 있다는 점에서 명예퇴직을 더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

전문가들은 올해 대규모 ‘명퇴 붐’이 불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우선 지난해 정부 정책 등으로 인위적인 구조조정을 최대한
자제해 왔던 기업들이 올해 본격적인 몸집 줄이기에 나설 가능성이 크다. 글로벌 경제 위기의 격동 속에서 ‘승자’의 편에 서지
못한 기업들도 구조조정이 불가피한 처지다. 기업의 고민은 재무구조 개선보다 인력 구조 개편에 무게가 쏠리고 있다. 상당수
기업들이 외환위기 이후 신규 충원이 제대로 안 돼 고령 인력 비중이 턱없이 높은 기형적 구조이기 때문이다.

이제 ‘명퇴’는 그리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지만 조기 퇴직자들이 기댈 수 있는 ‘언덕’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반 나아진 것이 없다.
일단 퇴직하면 그동안 보호해 주던 보호막은 사라지고 창업이든, 재취업이든, 귀농이든 순전히 개인의 힘으로 개척해야 하는
갈림길에 서게 된다.

주명룡 대한은퇴자협회 회장은 “조기 퇴직으로 사회보험과 자신의 존재를 알리던 명함은 사라지고 재취업의 길도 막막하다”며
“목돈의 유혹에 끌려 아무 준비 없이 선택하는 본인 지원형 명퇴는 바람직하지 않다”며 안타까워했다. 전직 지원 서비스 전문
업체인 제이엠커리어 윤종만 대표는 “몇몇 대기업을 빼고는 퇴직자 지원 제도를 갖고 있는 기업이 거의 없다”며 “사회적인 인식
전환이 시급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작년 조사된 한국인의 기대 수명은 남성 75.9세, 여성 82.5세다. 40~50대에 조기 퇴직할 경우 최소 20년 이상의 새로운 삶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2010년 겨울 수많은 조기 퇴직자들이 닫힌 문을 뒤로하고 제2의 인생을 향해 열린 또 다른 행운의 문을 찾아 나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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