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투(#Me Too)와 위드유(#With You) 운동에서 한걸음 더들어가 보자

문제는 차이가 아니라 모순이다

  • 김승호
  • 승인 2018.03.12 08:00

▲ 김승호 전태일을따르는사이버노동대학 대표

현실 사회주의 몰락 이후 포스트모더니즘이 득세하면서 ‘모순’이라는 단어를 ‘차이’라는 단어가 대체했다. 차이를 존중하고 차별하지 마라는 말도 유행했다. 그렇게 차이를 존중하고 배려하면 세상이 갈등이 없고 평화로워진다는 뜻이다. 그러나 차이라는 개념이 모순이라는 개념을 결코 대신할 수 없음을 요즘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마오쩌둥은 그의 유명한 <모순론>에서 모순의 보편성을 논하면서 차이는 곧 모순이라고 했다. 그렇다. 차이는 일정한 조건하에서는 차별을 낳고, 차별은 머지않아 대립과 투쟁을 만들어 낸다. 그런데 차이가 차별을 낳게 하는 그 ‘일정한 조건’은 인간의 일부분이 다른 일부분을 지배하고 착취하는 계급사회에서는 특수한 경우가 아니라 보편적 상황이다. 그러므로 계급사회에서는 마오쩌둥이 애기했듯이 차이가 곧 모순이다. 성적인 차이가 곧 성적인 차별과 착취로 이어지며, 이 차별은 대립과 투쟁을 불러일으킨다.

요즘 미투(#Me Too)와 위드유(#With You) 운동이 들불처럼 퍼져나가고 있다. 이 운동을 혁명적 움직임으로 평가하면서 동시에 두 가지 중요한 지점을 환기하고 싶다. 하나는 남성의 여성에 대한 성적 폭력행사는 그 행위를 행한 개인의 일탈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한 행위가 지금 폭로되고 있는 검사·연출가·배우·교수·도지사와 국회의원 등 소수의 남자들만 저지른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권력관계, 다시 말해 갑을관계가 있는 모든 곳에서 이런 성적 폭력이 저질러지고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성적 폭력을 근절하려면 일부 저명인사들의 성폭력을 고발하고 처벌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성적 억압구조와 차별적 행위를 문제 삼고 변혁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여성 억압구조는 얼핏 생각하면 남성이 여성보다 우위에 서 있는 가부장제 구조로 생각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인식은 피상적이다. 가부장적 권력구조가 생겨나고 지속된 이유부터 살펴봐야 한다.

원시공동체 모계사회에서는 가부장제라는 것이 아예 없었다. 아시아적 생산양식에서 노예제를 거쳐 자본제 사회에 이르기까지 이어진, 인간의 일부가 다른 일부를 지배·착취하는 계급사회가 가부장제에 의한 여성 억압의 지배·착취 구조를 만들어 내고 지속시켰다.

그런 성적 억압구조는 가부장제만 있는 게 아니다. 가부장제가 크게 해체된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여성에 대한 성적 차별과 폭력이 만연해 있다. 그러므로 성적 억압과 착취를 낳는 사회구조는 가부장제와 더불어, 그리고 더 근본적으로, 자본주의를 비롯한 계급사회 그 자체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문제 해결도 가부장제 해체에 머무르지 않고 계급 모순 타파로 나아가야만 한다.

또 하나는 미투운동 과정에서 성폭력 행위자로 폭로된 사람들 가운데 진보적이라고 자칭하는 유명 정치인들이 다수 포함돼 있는 지점이다. 그동안 성적 폭력행사는 주로 수구 정치인이 저지른 도덕적 일탈로 인식돼 왔다. 민주화운동을 하면서 인간 존엄성에 대한 도덕심을 내면화한 진보적 정치인에게서는 그런 일탈행위가 일어나지 않을 것으로 기대돼 왔다.

이 지점에서 진보란 도대체 무엇인가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미국식으로는 루스벨트와 케네디로 상징되는 자유주의가 곧 진보로 간주되고 있는데, 이 진보는 결코 계급지배를 부정하지 않는다. 통속적으로 말하자면 따뜻한 자본주의나 착한 자본주의를 신봉하면서 인간의 각종 욕망추구에 대해서는 더 긍정적인 가치체계다. 그래서 케네디나 클린턴은 트럼프에 못지않게 성적으로 방종했다.

우리나라에서 진보라고 자칭하는 정치세력은 대개 자유주의자들이다. 그들이 지향하는 목표는 참다운 진보인 계급 없는 사회가 아니라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 사회다. 그러므로 그들에게서 자본가계급 일반과 다른 참다운 인간상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환상이다. 많은 경우 그것은 만들어진 이미지일 뿐이다. 그들은 결코 전태일처럼 강자와 약자로 분열된 사회구조를 해체하려 하지 않으며, 기껏 약자를 존중하고 배려하려고 할 뿐이다. 분열과 지배의 구조가 없어지면 자신들의 특권도 사라지기 때문이다.

‘모순의 보편성’에 대해 생각하면 낡은 것과 새로운 것의 모순을 떠올리게 된다. 계급지배가 완전히 지양된 공산주의 사회가 아닌 한 인간사회에서 모순이 없는 경우는 없을 것이다. 이 모순은 공시(共時)적으로는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의 대립과 투쟁으로 나타나지만 통시(通時)적으로는 낡은 것과 새로운 것의 대립과 투쟁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스탈린의 통찰이기도 하다. 오늘날 세계가, 그 안에 있는 우리 민족의 현실이 심하게 요동치고 있다. 주변을 둘러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좀 더 물러서서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도 있다. 지금의 격동은 낡은 것과 새로운 것 사이의 대립과 투쟁이 만들어 내는 변화다. 무엇이 낡은 것인가. 자본주의와 계급사회다. 선진국들에서 자본주의가 낡아 못 쓰게 됐기 때문에 기존 주류 정치세력들이 추풍낙엽이 되고 있다. 미 제국주의는 낡지 않았는가. 그렇지 않다면 트럼프 같은 돌출적 인물이 대통령이 될 수 없을 것이다.

남한에서는 그런 격변이 박근혜 탄핵과 촛불혁명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그것은 거대한 혁명의 서막일 뿐이다. 안으로 미투운동이 터져 나왔다. 밖으로 한반도 평화체제 실현이 의제에 오르고 있다. 그것도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그보다 더 크고 더 새로운 것들이, 자본주의 안의 민주주의를 넘어 계급 없는 인간해방 세상을 지향하는 거대한 힘들이 해수면 아래에서 꿈틀거리고 있다. 모순은 이렇게 표면만이 아니라 내면에서 더 크게 작동한다.

전태일을따르는사이버노동대학 대표 (seung7427@daum.net)

김승호  seung7427@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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