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타파] 보이스피싱 범죄에 악용된 KT의 법인폰
작성자: 최종관리자 | 조회: 196회 | 작성: 2024년 6월 3일 8:27 오후보이스피싱 범죄에 악용된 KT의 법인폰
검찰이나 경찰, 금융감독원 등을 사칭해 피해자를 속여 계좌이체를 유도하는 보이스피싱 범죄.
지난 2016년부터 지난해 말까지 8년간 보이스피싱 피해액은 3조 9,030억 원에 달한다.
보이스피싱 범죄가 좀처럼 근절되지 않는 원인 중 하나는 범죄에 악용될 수 있는 은행 계좌와 휴대전화 번호가 꾸준히 공급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주로 노숙자들의 명의로 만든 대포폰과 대포통장이 범죄에 사용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보이스피싱 범죄가 사상 최대를 기록했던 2019년, KT 동대구지사가 한 배달중개업체에 판매한 법인 핸드폰 50여 대가 무더기로 범죄에 이용된 사실이 드러났다. 법인폰은 개인이 아니라 회사 법인에 판매하는 휴대전화로, 통상 더 저렴한 요금제를 적용받는다.
뉴스타파는 KT가 판매한 법인폰이 범죄에 악용되는 과정에 KT 측의 책임은 없는지 따져봤다.
1,153대 VS 901대의 차이?
KT는 2020년 4월, 이른바 ‘단말기 깡’으로 15억 원의 손해를 입었다며 배달대행 중개업체인 세림에스엘의 임직원 3명을 사기 혐의로 고소했다. KT는 고소장에서 이들이 휴대전화를 정상적으로 이용할 의사나 능력 없이 법인 명의로 다량의 휴대전화를 개통한 뒤, 단말기 할부 대금과 이용 요금을 내지 않아 큰 손해를 입었다고 주장했다.
이로부터 3년 여가 지난 지난해 9월, 대구지방법원은 세림에스엘 임직원 3명에게 각각 징역 2년에서 징역 3년을 선고했다. KT의 주장대로 사기 행위가 맞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런데 법원은 KT가 고소장에서 적시한 피해 규모 전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KT가 2019년 1월부터 10월까지 세림에스엘에 판매한 휴대전화는 모두 1,422대. KT는 이 가운데 중도해지 및 기기 변경된 124대 등을 제외한 1,153대가 위법하게 판매됐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검찰은 2019년 1월부터 5월까지 판매된 521대를 제외하고, 2019년 6월부터 10월 사이에 판매된 901대만 사기 혐의를 적용했다. 대구지법도 마찬가지로 2019년 6월 이후 개통된 901대에 대해서만 유죄를 인정했다.
법원과 검찰은 세림에스엘 측이 처음부터 사기를 칠 목적으로 휴대전화를 대량으로 개통한 것은 아니라고 본 것이다.
그들은 왜 사기범이 됐나
법인 등기부등본에 따르면 세림에스엘은 2017년 12월 설립됐다. 1년 뒤인 2018년 12월, 사업 목적에 ‘배달대행 프로그램 운영 관리업’을 추가했다. 배달대행 업체와 배달대행 프로그램 운영사를 중개하면서 배달 기사들이 주문콜을 받으면 1건당 30원에서 80원의 수수료를 받았다.
세림에스엘은 여기에 수익 모델을 하나 더 만들었다. 이른바 ‘법인폰 임대업’이다.
배달 라이더 중에는 기초생활수급자나 주말과 휴일에 몰래 아르바이트를 하는 공무원의 비중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본인 명의의 휴대전화로 주문콜을 받으면 소득이 노출될 것을 우려했다.
이에 세림에스엘은 법인 명의로 핸드폰을 개통해 배달 라이더에게 임대하고, 매달 휴대폰 요금 외에 1대당 1만 5,000원에서 2만 원의 임대료를 받았다.
사업 모델만 놓고 보면 세림에스엘이 손해를 보기 어려운 구조다.
김철우 세림에스엘 대표는 그러나 KT 측의 법인폰 밀어내기 영업 관행 때문에 예상치 못한 손실을 입었다고 주장했다.
□ 기자 : 2월부터 5월까지 300대를 추가로 개통할 필요가 있었던 건가요?
■ 김철우 세림에스엘 대표 : 아니요. 없었죠. 없었는데 그 때 당시에 S10 기종이 신형으로 나왔을 때인데 저 모르게 S9이 개통됐고, S9을 배달기사들이 선호를 안 한다고 해 신형으로 교환해달라고 하니까 교환해 준다고 말만하고 교환도 안 해주고…
– 김철우 세림에스엘 대표와의 인터뷰 발췌
KT 동대구지사는 2019년 1월, 세림에스엘에 120대의 휴대전화를 처음 개통한 것을 시작으로 2월 102대, 3월 100대(총 공급 대수는 200대이나 이중 기기 변경으로 교환된 100대를 제외한 수치), 4월 1대, 5월 98대 등 모두 521대를 팔았다.
그러나 당시 세림에스엘은 이 많은 휴대전화를 소화할 능력이 없었다.
세림에스엘 측이 검찰에 제출한 자료를 보면, 2019년 2월 당시 배달 라이더들에게 임대한 휴대전화는 45대에 불과했다. 누적 기준 임대량은 3월 46대, 4월 72대, 5월 68대에 그쳤다.
반면 2019년 5월 당시 세림에스엘이 떠안은 법인폰 재고 물량은 353대로 불어났다.
법인폰 임대 수입은 같은 해 2월 211만 원에서 5월 328만 원으로 소폭 늘었지만, 같은 기간 KT에 납부해야 할 법인폰 요금은 월 269만 원에서 1,729만 원으로 6.4배 증가했다.
당시 자본금 규모가 500만 원에 불과했던 영세 기업이 감당하기 어려운 금액이다.
달콤했지만 결국에는 끔찍했던 ‘P값’
법인폰 재고가 늘어날수록 손실이 커진다는 것은 세림에스엘 측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법인폰을 계속 개통한 이유 중 하나는 바로 ‘P값’때문이다.
P값이란 KT가 영업 대리점에 제공하는 일종의 판매수당인데 일명 ‘개통수수료’라고도 부른다. 통상 P값은 핸드폰 단말기 종류 등에 따라 달리 책정된다고 한다. 세림에스엘의 경우 법인폰 1대당 최소 5만 원에서 최고 35만원까지 받았다.
이 같은 P값의 존재를 세림에스엘 측에 알려주고, 적극 활용하도록 제안한 이는 KT 동대구지사 법인폰 영업대표 이 모 씨였다. 이 씨는 대리점에 지시해 당초 대리점 몫인 P값을 세림에스엘에 넘겨주게 했다.
그러나 P값으로 요금을 대체하는 꼼수는 곧 한계에 부딪혔다. 세림에스엘이 2019년 5월까지 받은 P값은 모두 6,200만 원. 반면 6월까지 KT에 낸 전화요금은 6,500만 원이었다.
게다가 당시 세림에스엘은 배달대행 업체에 빌려준 8억 원 상당의 대여금을 제때 되돌려 받지 못한 상태였고, 배달프로그램의 잦은 에러와 이에 따른 배달앱 프로그램 교체 문제로 수입이 줄어 자금 압박을 받았다고 한다.
결국, 세림에스엘은 2019년 6월 재고로 갖고 있던 법인폰을 중고로 매각하기 시작했다. 또 P값을 받아 회사 운영 경비와 법인폰 요금을 내기 위해 2019년 6월부터 10월까지 901대의 법인폰을 추가 개통해 중고폰으로 판매했다.
재고가 남아있는데도 불구하고 300여 대의 법인폰을 추가 구매하도록 한 KT의 밀어내기식 영업 방식과 P값이라는 달콤한 꼬드김이 없었다면, 세림에스엘측이 거의 매달 100대 씩 법인폰을 추가 개통했을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KT, ‘세림에스엘이 주도적으로 허위 트래픽 일으켜 기망했다’ 주장
이에 대해 KT는 ‘KT의 법인 영업 방식이 (세림에스엘) 사기 행각의 원인’이라는 것은 피고인, 즉 세림에스엘 측의 일방적인 주장이며, 자금 조달 등의 목적을 갖고 세림에스엘 주도하에 단말기 개통이 진행됐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했다.
KT는 또 세림에스엘이 지불 의사와 능력이 없는 상황에서 KT를 기망했고, 휴대전화 수요가 증가하는 것처럼 가장하기 위해 주도적으로 허위 트래픽을 일으켰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법원에서 유죄로 인정한 KT의 사기 피해는 2019년 6월 이후 개통된 휴대전화 901대다.
대구지검은 수사과정에서 2019년 1월부터 5월까지 개통된 법인폰 521대중 213대가 중고폰으로 판매된 사실을 확인했지만 법적 책임을 묻지 않았다. 2019년 5월까지는 세림에스엘 측이 사기를 목적으로 법인폰을 개통한 것이 아니라는 방증으로 볼 수 있다.
게다가 세림에스엘 측이 주도적으로 허위 트래픽을 일으켰다는 KT의 주장 역시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러나 허위 트래픽 제안자는 KT동대구지사 법인폰 영업대표
애초에 허위 트래픽을 제안한 인물이 다름 아닌 KT 동대구지사의 법인폰 영업대표였기 때문이다.
2019년 8월 13일 오전 9시, KT 본사 기업무선기획팀은 동대구지사 법인폰 영업팀 등에 이메일을 보냈다. 기업무선기획팀은 “세림에스엘이 개통한 법인폰 사용 현황을 모니터닝한 결과, 음성통화와 데이터 발생이 거의 되지 않았다”며 “이에 대한 소명과 정당성이 인정될 때까지 법인 명의 특판을 중단한다”고 통보했다.
이 이메일이 발송된 시각부터 45분 뒤에 녹음된 전화 통화에서 KT 동대구지사 법인폰 영업대표 이 모 씨는 세림에스엘 측에 이렇게 말했다.
□ 이00 / KT 동대구지사 법인폰 영업대표 : 5~6월까지 정상적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그렇게 나중에 소명하면 돼. 일단은 전화기 갖고 있는 것도 다 까 가지고 한 번씩 까가, 한 번 껐다 켰다 해야 되는데 그걸 안 했네. 한 번도.
■ 김00 / 세림에스엘 직원 : 참 머리 아프네
□ 이00 /KT 동대구지사 법인폰 영업대표 : 이거는 거짓말을 시켜도 좀 완벽하게 시켜야 되는데. 우리가 그걸 저번에 나 이사(나진수 전 세림에스엘 감사)한테 한 번 캤는데 저번에 우리가 데이터 발생하자고 이야기를
■ 김00 / 세림에스엘 직원 : 뭐 요금만 잘 내면 된다 카더만요.
– 2019년 8월 13일 오전 9시 45분 녹음된 KT동대구지사 법인폰 영업대표와 세림에스엘 측과의 전화통화 발췌
이 씨는 KT 기획무선팀으로부터 모니터닝 결과를 받기 전에 이미 ‘데이터’ 즉 트래픽을 허위로 만들도록 제안했던 것이다.
뉴스타파는 이 씨에게 당시 녹음 내용을 들려주고 해명을 요청했다.
내가 뭐 전화기를 불법으로 쓰라 했어요? 그런 말이 아닙니다. 전화기를 놔두더라도 개통을 해서 누구(배달 라이더)한테 못 주더라도, 개통을 해서 그런 말을 완벽히 해 놔야 나중에 후환이 없다는 그 말입니다.
– KT 동대구지사 법인폰 영업대표 이 모 씨의 해명
하지만 나진수 세림에스엘 감사는 이 씨로부터 허위 트래픽을 만드는 방법까지 구체적으로 지시받았다고 주장했다. 나진수 감사는 “‘울산이면 울산, 창원이면 창원 지역에서 해당 개수만큼 (핸드폰을)가지고 내려가서 유심을 꼽아 전원을 켜라. 시간은 몇 초라도 상관없으니 인터넷을 사용하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말했다.
취재 내용을 정리하면, KT의 주장과는 달리 과도한 법인폰 재고 문제가 들통나지 않도록 KT 동대구지사 직원이 허위 트래픽을 주도했을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인다.
KT가 판매한 법인폰 52대, 보이스피싱에 악용돼
허위 트래픽 문제는 보이스피싱 범죄로 이어졌다.
경찰 조사 결과, KT가 세림에스엘에 판매한 법인폰 중 범죄에 악용된 것은 52대.
보이스피싱 19회, 발신번호 변작 377회, 불법대부광고 3회 등 모두 399건의 범죄에 사용됐다. 발신번호 변작이란 해외에 있는 사람이 마치 국내에서 전화를 건 것처럼 발신번호를 조작한 것으로 주로 보이스피싱 범죄에 사용된다.
세림에스엘은 실제 사용하지 않는 핸드폰을 마치 정상적으로 사용한 것처럼 꾸미기 위해 아르바이트 직원 2명을 고용, 허위로 트래픽을 발생시켰다. 또 지인 박 모 씨 등에게 휴대전화 유심 칩을 나눠주고, 허위 트래픽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는데 이 때 건네진 유심 칩이 의도치 않게 범죄 집단에게 유출됐다는게 세림에스엘 측의 설명이다.
물론 세림에스엘 임직원들이 2019년 6월 이후 자금을 융통하기 위해 법인폰을 대량으로 개통하고, 중고폰으로 판매한 것은 명백한 사기 행위다.
그러나 KT가 설립된 지 고작 1년가량 된 영세 기업에 521대의 핸드폰을 판매하지 않았다면, 또 KT 동대구지사 법인폰 영업대표가 당장 쓰지도 못할 법인폰을 수백대씩 쟁여두게 하고, 법인폰이 실제 사용되지 않고 있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허위 트래픽을 만들도록 유도하지 않았다면, KT가 판매한 법인폰이 보이스피싱 범죄에 악용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지 모른다.
뉴스타파 황일송 ilsong@newstap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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