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규직 이제그만 공통투쟁’과 민주노총 금속노조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지난 25일 저녁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불법파견 사용자 엄정 처벌과 조속한 대법원 판결을 요구하며 야간문화제를 하려고 하자, 경찰이 제지하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세상읽기] 류영재 | 의정부지방법원 남양주지원 판사
법을 공부하면서 가끔은 우리 사회가 헌법 가치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않다는 느낌을 받는다.
대표적인 예가 ‘법치주의’ 개념이다. 법치주의란 법의 지배, 즉 법에 의한 통치를 의미한다. 법치주의의 반대 개념은 인치(人治), 즉 사람에 의한 자의적 통치가 된다. 인치에는 ‘법을 사용한 통치’도 포함된다. 통치 권한을 가진 국가기관이 법을 임의로 만들고 자의적으로 해석한 후 ‘법을 지키라’는 명목으로 자신의 입맛대로 통치를 행한다면, 그것은 법치가 아니라 인치다. 따라서 법치주의의 핵심은 시민을 향한 ‘준법정신’의 강조가 아니라 통치 권력을 향한 ‘자의적 통치 권한 행사의 금지’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으로 시민이 통치기관을 향해 법을 준수하고 자의적 통치 권한 행사를 금지하라고 외칠 때 사용되어야 할 ‘법치주의’가 거꾸로 통치기관이 시민을 향해 준법을 명목으로 으름장을 놓을 때 사용되는 장면을 종종 목격한다. 그럴 때면 강한 위화감을 느낀다. 우리 사회가 근·현대화 과정에서 ‘법치주의’를 쟁취한 경험, 즉 영국의 마그나 카르타처럼 법 위에 선 존재였던 절대군주를 법 앞에서 평등한 존재로 끌어내린 경험을 갖지 못해서 법치주의에 대한 이해가 힘든 것일까 의문을 품게 된다.그에 비해 근·현대화 과정에서 우리 사회도 다른 곳 못지않게 충분히 경험하고 그 효용성을 역사적으로 입증해낸 권리가 존재한다고 느끼기도 하는데, 대표적으로 ‘집회·시위의 자유’를 들 수 있다. 먼 옛날 조선의 동학농민운동에서부터 일본 강제불법점령 시기의 3·1운동, 정권 독재 시기의 4·19 혁명에서부터 5·18 민주화 항쟁을 거쳐 6월 항쟁에 이르기까지의 수많은 집회 및 시위, 민주화 이후 대통령의 탄핵을 평화적·법적으로 이끈 촛불집회를 비롯한 크고 작은 집회 및 시위를 찬찬히 살펴보자면, 우리 사회는 집회 및 시위가 살렸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특히 집회·시위의 자유는 민주주의를 위한 핵심적 요소 중 하나로 손꼽히는데, 우리 사회는 민주주의가 어떤 내용인지, 왜 집회·시위의 자유가 민주주의를 위해 꼭 필요한 권리인지 개념적으로 이해하기도 전에 본능적으로 ‘집회·시위를 통해 민주주의를 쟁취한 상황’을 구현해낸 것 같다는 점이 매우 인상적이다.민주주의에 있어 집회 및 시위의 자유가 차지하는 위치를 이해하기 위해선 민주주의에 대한 개념부터 이해해야 한다. 헌법재판소는 민주주의를 ‘시민의 자기지배’로 표현하였다. 시민 개개인이 왕이나 독재자, 권력자나 부자, 높은 계급의 일원 등 누군가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 의해서만 지배받는다는 의미다.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는 사라진다. 민주주의가 극단적으로 구현되는 사회에서는 사회의 구성원들이 만장일치로 동의하는 제한 외에는 누군가에 대하여 제한할 수 없게 된다. 이러한 사회는 현실적으로 실현될 수 없으므로 민주주의 정체에서는 시민의 대표자를 내세워 시민이 구속되는 사회질서 체계를 만들게 되는데, 그것이 우리 사회에서의 국회와 법률이다. 이 경우에도 법과 질서가 소수자 권리의 본질을 침해할 수는 없도록 한다. 만일 시민의 대표자가 다수 시민의 의사만을 대표하여 소수자 권리를 침해하는 법과 질서를 구축한다면 소수자 관점에서는 사회적 다수에 의해 소수가 지배당하는 사회가 만들어지는 것이고, 이는 소수자에게 민주주의 사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다수결의 원칙이 소수자 권리 보장을 이유로 제한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나아가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사회 구성원 개개인의 존재 및 사상이 동등하게 존중되어야 하므로 다양성의 존중은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가 된다.민주주의 사회에서 집회 및 시위의 자유가 특히 중요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바로 사람들이 초능력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은 경험하지 못한 타인의 사정을 인지할 수 없다. 이해가 경험의 영역 밖까지 확장되기 위해서는 보고, 듣고, 상상해보아야 한다. 모든 존재가 보이고 들려야 다수는 소수를 인지할 수 있게 된다. 인지해야 존중할 수 있고 권리를 침해하지 않을 수 있다. 소수자가 충분히 존중받고 본질적 권리를 보장받게 되면 소수자라는 구분은 무의미해진다. 그러다 다수와 소수의 위치가 전복될 수도 있다. 이러한 사회가 민주주의 사회다. 집회 및 시위는 사회에서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던 사람을 드러낸다. 집회 및 시위의 자유가 민주주의를 위한 핵심 요소로 평가받는 이유다.우리 헌법은 집회 및 시위 허가제를 금지한다. 국가의 허락 아래에서만 집회 및 시위를 열 수 있는 사회는 민주주의 사회라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법원 및 헌법재판소는 정치권력 또는 대중이 ‘보고 들을 수 있는 장소’에서 집회·시위를 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여러차례 강조했다. 우리나라가 가입·비준하여 국내법의 효력을 갖는 유엔 자유권규약(시민적·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은 ‘평화적 집회의 권리’를 인정한다. 자유권규약위원회는 2020년 일반논평 37호에서 평화적 집회의 권리는 소외된 이에게 특히 중요하다고 설명하며 그 권리가 존중·보장되지 않는 상황을 전형적인 탄압의 표시로 간주했다. 집회 및 시위로 인해 교통이 방해되거나 경제적 활동에 혼란이 초래된다고 하여도 그 집회 및 시위가 평화적인 한 보호받아야 하고, 국내법상 요건을 충족하지 못한 집회·시위(이른바 ‘불법 집회·시위’)도 평화적인 한 보호대상이 된다고 설명한다. 평화적 집회·시위인지 여부는 일부 참가자들의 일탈적 폭력행위나 집회 및 시위를 부당하게 제한하려는 시도에 대항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폭력을 기준으로 판단되어선 안 된다고 말한다. 자유권규약위원회는 특히 자유권규약상 국가의 의무를 강조한다. 국가는 집회 및 시위가 무사히 개최될 수 있도록 최대한 도울 의무를 부담한다. 집회 및 시위를 교통 방해나 불법 집회 이력 등을 이유로 전면 금지해서는 안 됨은 물론이고, 집회 및 시위를 위한 공간 확보에서부터 참여자들이 다치지 않도록 보호할 의무까지 부담한다. 위원회는 집회 및 시위를 금지하거나 해산하는 조치는 가능한 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또한 집회·시위의 금지 및 해산 조치가 남용되면 형식상 적법하더라도 자유권 규약 위반이 될 수 있음을 경고한다.그 어느 때보다 법치주의, 민주주의, 자유의 가치가 강조되는 요즈음이다. 봄에서 여름으로 접어들며 낮이 길어지고 밤을 버티기에도 상대적으로 수월해지는 시기가 되었으니만큼 국가는 헌법과 국제인권법(특히 자유권규약)의 취지에 맞게 민주주의의 핵심 요소인 집회 및 시위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여 법치주의와 민주주의의 가치를 충실히 구현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