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밀어주며 영업했던 박씨, 쇼크받고 쓰러진 이유 [ 2013.04.08 ]

이해관 KT새노조 위원장은 이석채 회장을 “진심으로” 만나고 싶은 사람 중 한 명이다. 그는 1994년 한국통신 최초 민주노조 설립에 참여했고, 12년을 해고노동자로 살았다. 2007년 복직해 KT새노조를 조직했다. 그러다 지난해 말 또 다시 해고됐다. 5일 오전 서울 청파동 KT민주동지회·해고자협의회 사무실에서 만난 이해관 위원장은 “이석채 회장을 만나고 싶다”는 말을 강조해달라고 부탁했다. 그의 인생의 절반 이상은 KT다. 그에게 “왜 싸우는지” 물었다. 

이해관 위원장은 82학번으로 학생운동 출신이다. ‘감방’에도 다녀왔다. 당시 학생운동 진영의 슬로건은 ‘현장 속으로’였다. 그도 선배들을 따라 공장에 위장취업했다가 1987년 7~9월 노동자 대투쟁 때 해고됐다. 이후 짧은 기간 노동운동 활동가 조직에 몸을 담았다.

KT 입사는 그에게 타협의 산물이었다. 그는 노태우 정권 시절 국가보안법 위반 사상범이 사법고시에 합격한 소식을 듣고 공기업 한국통신(현 KT)의 문을 두드렸다. 그는 “지금처럼 상근비를 받고 활동하던 시절이 아니었다. 생활하기 어려웠다. 사람이 많은 공사에 들어가 노동운동을 하고 싶었다”고 회고했다.

이해관 위원장은 1989년 고졸 공채로 KT 전신인 한국통신에 입사했다. 내부 전화선을 연결하는 작업이 그의 주된 일이었다. 당시 노조는 한국노총 소속이었다. “노동을 하고 싶다”는 그의 꿈은 이뤄졌다. 이해관 위원장은 1994년 민주노조 당시 부위원장이 됐다. 당시 구호는 ‘임금 가이드라인 철폐’, ‘통신주권 수호’와 함께 ‘대리까지 33년, 웬 말이냐’였다.

“87년 항쟁 이후 민간부문 임금이 올라가자 정부는 공공부문 임금 인상을 억제했다. 임금 가이드라인 때문에 노동자들 불만이 많았다. 김영삼 정부는 세계화를 추진하기 시작했고, 공공부문 민영화 흐름이 생겼다. KT에서는 자의적인 인사권 때문에 고졸 사원은 대리가 되는데 33년이 걸리는 경우도 있었다. 이 구호는 유효했다.”

그러나 1995년 한통노조 사태가 일어났다. 김영삼 대통령은 당시 한통노조를 ‘국가전복세력’이라고 비난했다. 일체의 교섭도 없었다. 이해관 위원장은 당시 노조 부위원장이었고 해고됐다. 그는 2006년 KT노조에서 제명될 때까지 12년 동안 노조가 마련한 ‘신분보장기금’으로 생활을 꾸렸다.

   
이해관 KT새노조 위원장
 
그는 해고 당시 임금을 받으면서 노조 활동을 했다. 이런 가운데 그는 114 관련 분사 등에 대해 노조를 비판했다. 결국 KT 노조는 2006년 3월 그를 제명하기 이른다. 같은 해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심의위원회(민주화운동보상심의위)’는 1995년 한국통신 사태를 민주화운동으로 인정했고, 그는 이듬해 복직했다.

IMF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구조조정이 있었고, 2002년 민영화 이후 2차례 대규모 구조조정이 단행됐다. IMF 이전 6만여 명에 이르던 KT 노동자는 현재 3만 명이 됐다. 1990년대 통신산업은 노동집약적 산업이었지만 이후 빠르게 기술집약적 산업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해관 위원장은 “교환노동자가 하던 일을 컴퓨터가 대신하면서 구조조정이 시작됐다”고 말했다.

“114 노동자들의 경우, 사내에 전화번호 암기대회가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캐비넷 하나가 100만 가입자를 연결해주는 시대가 됐다. 자기의 일이 무용지물이 됐다. 회사는 필요없고 늙은 노동자를 내보내려고 했다. 새로운 시대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게 아니라 연고가 없는 곳에 보내고, 따돌렸다. 스트레스로만 따질 때 삼성전자보다 훨씬 셀 것이다.”

민영화되고 CP프로그램이 실행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KT 노동자들을 평가하는 기준은 연공서열이었다. 그래서 KT에서 몇 년 일했는지 알면 월급과 생활수준을 알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제 인사고과에 따라 연봉이 20% 이상 차이날 수 있다. 같이 입사했어도.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모른다. 예를 들어 팀원이 열 명이면 그 중 누군가는 F를 맞아야 한다. CP가 되어야 한다. 114 노동자의 고민, 민주노조 운동에 공감할 여유가 없다.”

인사권으로 노동강도가 좌지우지되는 공기업의 폐해는 민영화 이후 노동자를 통제하는 수단으로 더욱 강화된다. CP프로그램은 통신산업의 특성에 최적화된 인력퇴출프로그램이다. “KT는 기본적으로 네트워크 사업이다. 그런데 표준화는 굉장히 어렵다. 가설·AS 업무는 한 지역에 오래있을수록 노동자에게 이득이 된다. 어디에 전주가 있는지 알기 때문이다. 이걸 악용한 것이 CP프로그램이다. 직무, 지역을 옮긴다. 인사권은 전보다 더 중요해졌다.”

이런 까닭에 KT 노동자들은 CP프로그램의 직접적인 조력자가 되기도 한다. KT충주지사가 작성한 ‘부진인력 퇴출 및 관리방안’에는 “퇴출인력으로 인한 피해의식 확산”은 물론 “일반직원과의 격리로 소외감 유발(온정주의 절대금지)”가 있다. 이해관 위원장은 “(주변에서) CP를 왕따시키는 노동자들에게 무슨 희망이 있느냐고 묻는데 나도 공감한다”면서도 “그런데 이렇게 된 이유를 빼면 허탈해질 뿐”이라고 말했다.

“상품판매전담팀으로 발령이 난 박아무개씨의 사연이 기억에 남는다. 이 분은 교환원 출신인데 영업을 하게 됐다. 이분은 업무 시간에 공중목욕탕에 출입했다. ‘잘 팔 수 없어서 때를 밀어주면서 영업을 했다’는 것이 이 분 주장이었다. 그런데 회사는 ‘일을 안 했다’고 주장했다. 회사는 두 달 동안 박씨를 감시하고 사진을 꺼내 놓고 ‘징계를 받을 것인지, 퇴직할 건지’ 물었다. 그 자리에서 쇼크를 받아 쓰러졌다. ‘내가 다니는 회사가 이 지경까지 망가졌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민영화 이전 KT에는 ‘냉방에 사는 할머니에게 방한복을 벗어주고 왔다’ 등의 미담이 유행했다고 한다. 그러나 민영화 이후 성과가 중요해지고, CP프로그램이 작동하면서 미담은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해관 위원장은 “월급은 이전보다 많아졌지만 여유는 없어졌다”면서 “예전 한국통신 노동자들은 ‘동네머슴’이라고 불릴 정도로 자기가 담당한 동네의 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지만 쫓기다시피 일을 해야 하는 요즘 그럴 여유는 없다”고 말했다.

   
 
 

‘대리까지 33년’이 공기업의 폐해였다면 최근 KT 노동자들의 자살, 돌연사는 민영화된 공기업의 폐해다. 이해관 위원장은 “도장 찍고 사인을 하던 관리직이 전주를 올라가겠다고 낑낑대는 장면을 보면 모두 ‘이 사람은 6개월 있으면 날라가겠구나’라는 생각을 한다”면서 “스트레스가 쌓여도 풀지 못하고, 공감하지도 못하는 회사가 됐다. 노동의 측면에서 비극이다”라고 말했다.

“KT 직원들의 카카오톡 프로필에는 ‘가입 독려’ 문구가 적혀 있다.” 그러나 인터넷, 대리점에 대한 리베이트과 비교했을 때 개인영업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런 탓에 자기 돈 30~40만 원을 얹어 실적을 채우는 직원도 많다고 한다. 민영화된 공기업 KT와 다단계 유통업자의 판매방식이 동일한 셈이다.

이해관 위원장은 “실적이 좋으면 예산을 만질 수 있는 자리에 올라가기 때문에 자기 돈을 손해보는 직원도 있지만 대다수 직원들은 CP가 되지 않기 위해 돈을 쓰고 있다. 실질적으로 임금이 인하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해관 위원장은 복직하고 나서 20여 명의 동료들과 함께 KT새노조를 결성했다. 다수노조를 혁신하는 방법 대신 소수노조를 결성한 이유에 대해 이 위원장은 “모두 침묵하는 상황에서 8시간 근무제를 지키면서 사람답게 사는 모습을 보여주고, 진실을 말하고 싶은 사람들이 모인 것”이라고 말했다.

새노조의 주축은 대부분 정년이 십 년이 안 남은 동료들이다. 이 위원장은 “10년 지나면 정규직이 현저히 줄 것”이라면서 “결국 새노조가 소수인 게 문제는 아니다. 소수가 돌파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소수노조의 전략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경영진의 협상 파트너도 되지 못할뿐더러 폭로와 주장에 머물기 쉽다. KT가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하면서 노조가 이를 합의할 것으로 내다봤다. 이렇게 되면, KT는 그룹을 재편해야 하고 본사 직원은 특정 계열사로 옮겨 갈 가능성이 높다. 이해관 위원장은 “일본 노조의 사례처럼 ‘KT 남기 동맹’ 같은 것을 해볼 만하다”고 말했다.

이해관 위원장은 한국사회에서 이석채 회장을 가장 자주 비판하는 사람이다. 이 위원장은 “예전 KT 사장 자리는 ‘3~5년 황제처럼 놀다가는 곳’이었는데 이석채 회장의 ‘혁신의 전도사’를 자임해서 기대가 컸다”면서 “그러나 결과는 통신 투자 감소, 재벌 흉내내기, 특수관계인 거래들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인간적으로 이석채 회장을 꼭 만나고 싶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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