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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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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7월 23일 11:38 오전
인권으로 읽는 ‘21세기의 자본’
등록 : 2014.07.22 18:42수정 : 2014.07.22 18:42
일러스트레이션 유아영
조효제의 인권 오디세이
사회과학의 존립 목적이 무엇인가. 세상의 숨은 구조와 작동 방식을 분석하고 그것의 문제점을 파헤치며 어떤 가치관에 근거한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던가. 그것을 위해 학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설득력 있는 설명과 대안을 제시하고 사람들의 고정관념을 흔드는 논쟁을 주도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토마 피케티가 내놓은 <21세기의 자본>은 전세계 사회과학계에 적시타를 때린 히트작으로 많은 이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자본주의 체제의 역사적 심층구조와 작동 방식을 분석하고, 부가 소수에게 집중되어 세습되는 문제를 파헤치며, 불평등의 심화가 정치적 파탄으로 이어져선 안 된다는 가치관에 근거하여 최상위 부유층에 글로벌 누진세를 매기자는 대안을 제시한다. 오랜만에 사회과학 논쟁의 야전교범 같은 책이 등장한 셈이다.
“공동선에 입각한 경우에만 사회적 구분이 허용될 수 있다.” 피케티 책에 반복되는 문구다. 이 문장은 프랑스혁명이 시작된 뒤 1789년 8월26일 발표된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 1조에 나온다. 그렇다면 인권의 렌즈로도 ‘21세기의 자본’을 독해할 수 있지 않을까.
<21세기의 자본>은 흥미로운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일정한 규범적 서사의 틀 속에 경제사적인 실증연구와 주장을 채워놓았다. 경제학적 내용을 평가하는 건 필자의 능력 밖이므로 규범적 서사 부분만 이야기하려 한다. 피케티는 변죽을 울리는 완곡어법과는 거리가 멀다. 서론장의 맨 처음 인용된 제사에서부터 규범적 서사를 제시한 뒤 그것을 수차례 반복하고 변주한다. “공동선에 입각한 경우에만 사회적 구분이 허용될 수 있다.”
이 문장은 프랑스혁명이 시작된 뒤 1789년 8월26일에 발표된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 1조에 나온다. 선언의 원문에 ‘l’utilit<00E9> commune’으로 되어 있는 말을 피케티 책을 영역한 아서 골드해머가 ‘공동의 효용’(common utility)으로 옮겼다. 하지만 프랑스 헌법재판소의 공식 영역본은 이 말을 ‘공동선’(common good)으로 표현한다. 피케티가 프랑스혁명 인권선언을 화두로 제시했으니 경제학 렌즈만이 아니라 인권의 렌즈로도 <21세기의 자본>을 독해할 수 있어야 그의 메시지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피케티는 프랑스혁명이 부르주아 혁명으로는 최고봉의 경지를 보여주었다고 평가한다. 제도적 특권을 폐지하고 평등한 권리와 기회에 기반한 정치·사회 질서를 주창했다는 의미에서다. 그러나 평등한 권리와 기회균등이 선언되었다고 해서 부의 평등한 분포가 보장된 것은 아니다. 시장에서의 평등한 권리는 오히려 총체적인 평등권을 보장하지 못한다. 19세기의 정치제도는 인간의 총체적 권리가 아닌 재산권만 확실히 보장하는 식으로 왜곡되어 진화했다. 부르주아 혁명의 한계였다.
그런데 피케티는 불평등 자체는 자유의 필연적인 결과라고 본다. 하지만 불평등이 존재하더라도 그것은 법의 지배를 통한 효과적이고 효율적인 정의원칙에 의해서만 정당화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부유층은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끊임없이 새롭고 정교한 법적 장치를 고안한다. 신탁기금이나 재단을 통해 교묘하게 부를 세습시킨다. 이렇게 되면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미래세대의 평등권은 원천적으로 제한된다. 이런 식의 불평등은 불공정하고 불의한 것이다.
프랑스혁명 인권선언의 1조는 두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모든 사람은 출생과 더불어 그리고 평생토록 평등한 권리를 누린다”가 먼저 나온 뒤 “공동선에 입각한 경우에만 사회적 구분이 허용될 수 있다”가 이어진다. 그러니 1조는 만인의 평등권이라는 이상과 사회불평등의 현실이 공존하는 모순을 인정하면서, 그 모순을 해소할 방안을 찾는 조항이다. 증명의무를 불평등에 두고, 정히 불평등하려면 공동선에 입각했다는 점을 입증하라고 요구한다.
프랑스혁명 당시만 해도 구체제의 특권이야말로 공동선에 반하는 불평등의 극치로 여겨졌다. 그러나 오늘 현실에선 사회불평등이 공동선의 주적이 되었다. 따라서 가장 소외된 약자집단한테 도움이 될 때에만 그런 불평등을 인정할 수 있다. 피케티도 인정하는 바지만 이런 관점에서 보면 존 롤스, 아마르티아 센, 그리고 피케티는 모두 프랑스혁명 인권선언의 지성적 계승자들이다.
피케티는 21세기형 사회국가는 이런 식의 모순을 공정하게 다룰 수 있는 정치제도를 상상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본다. 현대에 적합한 재분배 방식은 인간의 권리확보 논리, 그리고 몇몇 핵심적 재화에 대한 평등한 접근성 원칙 위에 구축되어 있다. 20세기 사회국가에서 교육, 의료 등 핵심적 재화에 대한 평등한 접근성이 확보되었다면, 21세기에는 은퇴 후 삶을 통합적으로 보장하는 것이 핵심과제로 떠올랐다. 그것을 위해 민주적 토의와 정치적 대결을 통해 해결책을 마련해야 한다. 요컨대 ‘공정한 불평등’ 조건을 창출함으로써 만인의 평등한 인권이라는 이상을 실현하자는 말이다.
피케티가 경제학자로서 이런 주장을 내놓은 점이 참신하다면, 사회학에서는 진작부터 이 방면의 연구가 축적되어 왔다. 랜드먼과 라리자가 2009년에 발표한 ‘불평등과 인권’이라는 논문을 보자. 이들은 1980년부터 2004년 사이 세계 162개국을 대상으로 시계열 분석을 시도했다. 불평등이 심할수록 시민적·정치적 권리의 침해가 높다는 점이 통계적으로 밝혀졌다. 특히 소득불평등이 인권에 크게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독립변수임이 확인되었다.
불평등 외의 추가변수도 발견되었다. 민주주의의 수준이 높으면 인권보호가 더 잘되었다. 시민의 불만을 처리하고 자원 편중에 항의할 수 있는 제도적 채널이 보장되기 때문이다. 경제발전 수준이 높을수록 인권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점도 나타났다. 그런데 민주주의 수준이 비슷한 국가들이라도 불평등이 심하면 인권침해 문제가 많았다.
여기서 민주정치, 경제, 인권 간 일반적인 등식이 도출된다. 민주주의를 해야 인권이 좋아지고 민주주의가 후퇴하면 인권도 후퇴한다. 경제가 발전해야 인권이 좋아지고 경제가 나빠지면 인권도 나빠진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행하거나 경제가 발전해도 불평등이 심해지면 인권은 추락한다. 사회적 응집력이 떨어지면서 온갖 사회문제가 창궐하고 그것을 공권력으로 통제하려 들 때 더 큰 문제가 발생하는 악순환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고로 정치적 포용성이 높은 민주제도만으로는 인권보장이 안 된다. 경제적 포용성이 높은 경제제도가 뒷받침되어야 인권이 꽃피울 수 있다. 민주주의건 경제발전이건 자원재분배와 소득불평등 해소가 동반되어야 인권이 실제로 보장될 수 있다. 이러한 주장이 최근 논의되기 시작한 소득주도 성장론과 어떻게 연결될지 궁금하다.
랜드먼과 라리자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경제성장 노력은 발전의 질에 더욱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경제성장의 과실이 축적됨과 함께 국가의 부가 분배되어야 인권이 보장된다. 정부는 최악의 빈곤과 사회적 배제를 완화하기 위해 누진세 등을 통해 소득불평등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이들의 결론과 피케티의 주장이 어쩌면 이렇게도 비슷하게 나오는 것일까. 인간의 존엄성을 중심에 놓고 모든 점을 고민하고 사고하면 경제학이든 사회학이든 어떤 동일지점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 아닐까.
그러나 이런 이야기를 하면 주류 경제학을 신봉하는 사람들의 반응이 어떨지 벌써부터 짐작이 간다. 잘해야 정중한 무관심일 것이고, 심하면 노골적으로 무시할 가능성이 크다.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라고 힐난하지 않으면 다행이다. 세상 이치가 흔히 그러하듯, 아주 근본적인 차원에서 출발점이 다를 경우, 다시 말해 가치관이 전혀 다를 때엔 문제의 인식부터 해법에 이르기까지 무엇 하나 합의가 쉽지 않다.
세계은행이 재작년 펴낸 ‘인권과 경제학’ 보고서를 보면, 경제학은 총합적이고 평균적인 결과가 아니라, 인간 개별적이고 주변분포의 결과를 고려한 가치판단을 받아들여야 한다. 경제를 보는 시각에 근본적 변화가 오기 시작한 증거로 볼 수 있을 것인가.
조효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바로 이 때문에 인권원칙과 주류 경제학이 만나야 하고, 둘이 서로 상호보완 관계를 이뤄야 한다는 관점이 등장하고 있다. 세계은행에서 2012년에 펴낸 ‘인권과 경제학’이라는 보고서가 대표적이다. 이에 따르면 경제학은 총합적이고 평균적인 결과가 아니라, 인간 개별적이고 주변분포의 결과를 고려한 가치판단을 받아들여야 한다. 인권적 접근이 경제성장의 질을 높이고 빈곤 감소에 효과적 도구가 된다는 사실을 인정하자는 주장도 나온다. 경제를 바라보는 시각에 근본적인 변화가 오기 시작한 증거로 볼 수 있을 것인가. 피케티의 <21세기의 자본> 덕분에 ‘인권 경제학’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상상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조효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