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간 사측(KT)으로부터 노동탄압이 이젠 끝났으면 합니다”라고 고 김성현 조합원이 유서에서 밝힌 것은 어쩌면 ‘더 이상 노예로 살 수 없다’는 KT판 ‘인간선언’이기도 하다. 과연 KT에서 무슨 일이 어떻게 발생하고 진행되었기에 노동탄압이 지속되고 사망자가 폭증하며 특히 자살자와 돌연사 등이 심각할 정도로 증가하고 있는가?
이에 대한 답변을 하는데서 민영화 문제를 빼놓을 순 없다. 그냥 민영화가 아니라 초국적 투기자본의 초과이윤을 반영구적으로 보장하는 게 핵심이다. 사전 정지작업으로 저항세력인 노동조합의 무력화가 제 1과제로 추진됐다. KT에서 민영화는 언제부터 시작해 어떻게 완료됐고, 민주노조는 어떤 과정을 거치며 파괴됐는지 설명해야 유서에 등장하는 소위 ‘15년간 KT 노동탄압’의 실상을 이해할 수 있다.
1980년대 후반 공기업 한국통신의 민영화를 추진하던 정부와 경영진들은 ‘시장경쟁을 통하여 소비자에게는 저렴한 가격에 질 좋은 통신서비스를 제공하고, 노동자들에게는 정부의 통제로부터 벗어나 자율교섭에 의한 임금인상과 근로조건 개선’이라는 장밋빛 청사진을 제시했다.
하지만 1987년 7~8월 노동자 대투쟁 기간을 경과하면서 한국사회에 수많은 민주노조가 설립됐다. 당시 체신부에서 분리된 한국통신노조는 대표적인 어용노조로 1982년 1월 간선제로 출범했지만 매년 정부의 임금가이드라인(동결 또는 3%)에 무기력하게 대응했다.
조합원들은 상대적으로 저임금의 처지에 놓이게 됐고, 미국의 통신개방 압력과 재벌들의 민영화 요구에 굴복해 데이터통신 및 이동통신의 재벌특혜 매각 등과 맞물리면서 노조민주화 추진세력이 급속도로 확산됐다. 급기야 1994년 6월엔 직선제 규약개정과 함께 민주노조 집행부(5대 유덕상 집행부)가 조합원들의 압도적인 지지(득표율 66.3%)로 출범했다.
민주노조가 집권하자마자 현장 조합원들의 요구가 분출했다. 회사는 중앙과 각 지역본부에 노사협력팀 편제를 구축했다. 이때부터 KT에 본격적인 노무관리가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회사는 비밀리에 다물단 교육과 각종 동호회 활동 등을 통해 현장 조합원들을 치밀하게 장악하기 시작했고, 1996년 12월(6대집행부 선출)에 치러질 선거를 대비했다.
한국통신 노조는 미국의 통신개방 압력과 재벌들의 민영화 요구에 굴복한 김영삼 정권에 맞서는 ‘재벌특혜 반대 및 통신주권수호 투쟁’에서 ‘국가전복세력’으로 내몰렸다. 출범 1년 만인 1995년도에 수십 명의 해고자가 생겼고, 민주노조는 위기를 맞이했다. 결국 1996년 12월 실시된 노조선거에서 민주노조는 정권과 회사 측의 전방위적 개입 속에 패배했다. 예고됐던 통신개방과 민영화는 급물살을 탔다.
5대 민주노조 집행부 이후 다섯 번의 노조선거(6~11대 집행부)에서 민주노조 진영이 계속 패배한 15년은 재벌과 해외투기자본에게 민영화가 완료되는 과정이었다. 그리고 국부유출과 엄청난 인력구조조정이 실시되는 과정과 정확히 일치한다. 1994년 민주집행부 때 5만 명에 달하였던 조합원은 십여 차례 구조조정을 거치면서 2013년 6월 현재 절반 이하인 2만4천여 명으로 줄었다.
강제적인 인력구조조정에 저항해 1998년 7월과 2000년 12월 두 차례 명동성당에서 파업투쟁을 했다. 2001년 5월에는 114분사저지 본사점거농성 투쟁을 했고, 이 투쟁이 마지막이었다. 그리고 1993년 매각을 시작한 정부지분은 10년째인 2002년 5월 완전 매각됐고 2002년 8월 민영기업 KT가 출범했다.
해외자본의 지분은 49%이지만 의결과 배당에서 제외된 자사주를 빼면 사실상 최대주주가 됐다. 민영화 이후 매년 당기순이익은 평균 1조 원을 상회했다. 배당성향은 50%를 초과했고, 지난 10여 년 동안 고배당으로 인한 국부유출은 약 3조 원을 초과했다. 말하자면 초국적 투기자본이 확실하게 빨대를 꽂은 것이며 소유구조가 바뀌지 않는 한 半영구적이다.
영업이익이 1조 원을 상회하면서도 끊임없이 인력구조조정을 하고 특히 비밀퇴출프로그램까지 실행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봐야 한다. 포화상태에 있는 국내 통신시장을 감안한다면 경영진이 손쉽게 빠질 수 있는 유혹은 인력퇴출을 통한 비용절감과 수익창출이다.
초국적 투기자본에 대한 초과이윤은 철저한 노동탄압을 통해 안정적으로 보장되어 왔다. 노조집행부를 권력과 자본의 하위 파트너로 삼기 위해 특히 정권차원에서 단위사업장 노조선거에 1996년 선거부터 매번 개입했다. 회사 측은 노조선거 결과에 대해 관리자에게 책임을 묻는 확실한 ‘신상필벌’의 원칙을 관철해 나갔다. 관리자들은 배수진을 치고 개입했다.
회사측은 열성 조합원을 지속적으로 회유하고 압박했다. 민주후보자 출마를 위한 추천 서명도 공포분위기 속에 제대로 할 수 없게 됐다. 부정선거 감시를 위한 참관인에게 지속적으로 불이익을 줬다. 잘게 쪼갠 투·개표소에 민주진영은 절반도 참관인을 세우지 못했다. 구석찍기와 팀별 줄투표 등 온갖 부정투개표가 이루어졌다.
특히 2005년도 선거에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회사 측의 개입과 활동가들의 자포자기로 9%의 득표를 하기에 이르렀다. 비밀퇴출프로그램(CP)이 등장한 것도 2005년 선거 참패 이후 민주노조 세력의 지리멸렬한 상황 속에 벌어졌다.
현장을 완벽하게 장악했다고 판단한 정권이 낙하산 인사를 투입하기 위해 남중수 사장을 2008년 11월 구속한데 이어 본사 핵심노무라인에 있는 간부들을 십 수 차례 검찰에 소환하자 본사의 조직적인 선거개입이 차단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2008년 선거에서는 조합원들의 요구가 투표로 분출돼 지지율(42.79%)이 갑자기 상승하기도 했다. 조합원들은 건강하게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한 계기다.
2009년 5월 고과연봉제 노사합의와 7월 민주노총 탈퇴 그리고 12월 말 5992명의 대규모 특별명예퇴직 이후에 현장의 노동강도는 엄청나게 높아졌다. 수많은 낙하산 인사들이 포진한 이석채 회장 체제에서 2011년 12월 제 11대 노조 각급대표자 선거가 치러졌다. 이 선거에서는 법원의 선거중단 가처분 결정이 두 번 씩이나 내려지는 미증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1996년 12월 선거 이후 현재까지 전국적 범위에서 치러진 모든 주요선거에서 회사 측은 민주노조운동 세력에게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다. 물론 철저한 지배개입을 통해 관철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조합원이 목숨을 던져 진실을 밝히기 시작했다.
조태욱 KT노동인권센터 집행위원장
공정한 투개표 제도만 보장된다면 KT어용노조는 단 하루도 버틸 수 없게 된다. 잘게 쪼갠 투개표소 대신 조합원의 비밀투표를 보장할 수 있는 통합투개표 제도를 줄기차게 요구해도 어용노조와 회사 측은 한 덩어리가 돼 철저하게 외면한다.
통신공공성을 회복하기 위해 가야 할 길은 비록 멀지만 그 첫걸음은 어용노조를 민주노조로 바꾸는 일이다. 이번 고 김성현 조합원은 회사 측의 노동탄압 범죄사실들을 유서를 통해 적나라하게 밝히고 목숨을 던졌다. 이 사건의 의미는 이제 KT노동자들이 더 이상 후퇴할 지점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초국적 자본의 초과이윤과 이를 폭압적으로 관철하고 있는 이석채 낙하산 체제가 KT노동자들의 노동인권 및 생존권과 격렬한 모순관계로 충돌하는 상황임을 보여주고 있다.
내년은 1994년 민주노조가 출범한지 20주년이자 노동조합 선거가 있다. 어용노조를 민주노조를 바꿔내고 고 김성현 열사의 유훈인 “15년간의 노동탄압을 끝장내는 것”은 살아남아 있는 우리 모두의 절박한 과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