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조직 하면 졸라도 아닙니껴?

30년 전 1979년 12월 12일 그 날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격동의 민족사에서 큰 획을 그었음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1979년 10·26사태로 18년간 유지된 군사정권은 종말을 고하고 민주주의에 역행한 유신정권이 몰락했다. 이어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봇물처럼 터져나온 '서울의 봄'이 전 세계 관심을 모으는 가운데 인류사적 기대를 전면 부정하는 반동적 사건이 신군부에 의해 자행되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돼 유신독재가 몰락하면서 '서울의 봄'이라 불리는 민주화 열기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12월 12일 보안사령관 전두환 소장은 노태우 소장 등 군부내 비밀사조직 '하나회'를 동원하여 계엄 사령관이던 정승화 총장과 정병주 특전사령관,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 등을 체포구금하고, 국방부, 육군본부, 특전사령부 등 주요 군 시설을 점령하여 군부 실권을 장악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기까지 일련의 과정은 치밀한 계획에 의한 군권장악일 가능성이 있다. 12·12사태를 '역사상 가장 긴 쿠테타'의 시작으로 보는 이유다.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10·26사건 당시 박정희 대통령 시해 현장부근에 있었다는 것이 12·12사태의 빌미가 되기는 했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내란의도를 방조했다는 것이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반란에 협력하는 일부 장성들과 총리공관을 찾아 최규하 대통령 권한 대행에게 정승화 계엄사령관 체포 동의에 대한 재가를 요구할 때 내건 혐의는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으로부터 금품을 받았다는 거였다. 80년 3월 13일 국방부 계엄보통군법회의는 정승화 전 육군참모총장에 '내란 방조죄'를 적용하여 징역 10년을 선고하고 이등병으로 강등해 불명예 제대를 시킨다. 그러나 신군부 측이 처음 제기한 금품수수 혐의는 빠져있고, 나머지 혐의에 대해서도 그 실체를 입증하지 못하는 판결이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12·12와 같은 군권장악을 획책한 이유는 구조적인 데서 찾을 수 있다. 해방 이후 정부수립과 더불어 50년 6·25전쟁을 거치면서 6개월 미만 단기과정을 거친 장교들이 배출되었고, 심지어는 4주과정을 거치고 장교로 임관하는 과정이 있을 정도로 많은 장교들이 일시에 배출되었다. 4년제 정규육사 1기출신인 육사11기들에게는 이전 육사출신과 종합행정학교, 갑종출신 선배장교들이 진급과 보직에 장애물로 판단될 수밖에 없었다. 박정희라는 보호막이 없어진 상황에서 5·16쿠데타로 출세가도를 달려온 전두환은 생존을 위한 모험을 시도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군부의 장성급 구조를 보면 이전 육사출신과 육군종합학교출신, 갑종출신들이 보직 상층부를 차지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그리고 그들은 50세를 막 지났을 뿐이기 때문에 일선에서 물러나기까지 상당기간이 예상되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동해시 동해경비사령부로 좌천될 것이라는 루머가 12·12사태의 원인이라는 주장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당시 육사 11기의 선두주자인 하나회 멤버의 운명은 풍전등화와 같은 상황이었다. 그래서 하나회를 통해서 12·12군사반란을 준비했다. 일선 대대장과 연대장 상당수를 차지하던 정규육사출신 세력 또한 조직의 이해가 대립되는 상황에서는 전두환 보안사령관 지지세력으로 돌아설 수가 있다고 판단했다는 해석이다.



10·26직후 벌써 일본의 마이니치(매일)신문은 '한국의 군권을 전두환이 잡았다'라고 기사화했다. 그런 군권의 흐름을 우리 군 수뇌부만 몰랐던 것이다. 12·12사태는 군부 내 구조적인 군 기강문제로 볼 수 있다. 그렇지만 12·12사태 이후에 초래된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중앙정보부장 겸직, 5·17비상계엄확대로 정권 장악, 초법적 기관인 국보위 설치, 최규하 대통령 하야 등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반성과 교훈은 온전히 민주시민의 몫으로 남는다.



12월 12일 육군참모총장 체포, 13일 특전사령부 건물 총성





▲ 김오랑 중령의 묘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김오랑




1979년 12월 13일 0시 25분경, 서울 송파구 거여동 특전사령부 건물에서 총성이 울렸다. 전날인 12일 저녁 7시에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불법체포하는 과정에서 총장공관에서 울렸던 총성이 12·12 쿠데타의 시작을 알리는 총성이었다면 이 시각 특전사령부에서 울린 총소리는 그 마지막을 고하는 것이었다. 수도권 주변에서 위기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부대로 수경사와 특전사가 있었지만 수경사는 장태완 사령관이 부임한지 한 달도 되지 않아 실질적인 부대장악에 어려움이 있었다. 실제 가용병력을 거느리고 있던 30경비단과 33경비단의 두 단장이 쿠데타세력의 주력 병력이 된 상황에서 최강의 전투력과 기동성을 가진 특전사의 무력화와 사령관 체포는 쿠데타 성패의 분수령이었다.



특전사령부에서 총소리가 있기 전 최세창 제3공수여단장이 사령관실에서 황망히 뛰쳐나온다. 최 단장은 마지막으로 정 사령관을 회유하러 온 것이다. 비서실에 있던 김오랑 비서실장 귀에는 사령관 고함소리만 들렸다.



정병주 특전사령관은 중령시절인 1961년 5·16 쿠데타 당시에도 쿠데타 세력이 쿠데타 이후 군으로 복귀하지 않고 일정기간 군정(軍政)을 유지하려는 의도를 알고 쿠데타 세력에 반대하다 '반혁명 세력'으로 몰려 체포된 아픈 과거가 있었다. 당시 5·16쿠데타 세력에 체포되어 경회루 기둥에 묶여 있다가 3개월간 군 영창에 감금되었다.



정병주 특전사령관은 74년부터 특전사령관으로 부임해 특전사 형성기를 주도했다. 제7, 9, 11, 13공수여단을 창설시킨 장본인이며 60년도 말 공수단장 시절에는 전두환을 부단장으로 데리고 있었다. 특전사령관 재임시에도 9공수여단장을 거쳐 간 노태우는 물론이고, 박희도 1공수여단장, 최세창 3공수여단장, 장기오 5공수여단장이 사령관 직속 부하들이었다.



최세창 3공수여단장이 돌아간 뒤 10여분 후에 3공수여단 15대대장 박 모 중령이 이끄는 10여 명의 체포조가 사령관실로 진입한다. 그 시각 특전사령관 비서실에서는 비서실장인 김오랑 소령만이 사령관을 지키고 있었다. 당일 저녁 8시부터 출동준비 태세인 '진돗개 하나'가 발령되어 있어 전군은 비상사태이며 특전사령부 역시 모든 참모부 장교들이 출동준비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수 간부들이 자리를 지키지 않았다. 당시엔 수도권 주변 군부의 핵심 병력운용 부대장인 대대장과 연대장이 육사출신 하나회에 의해 장악되어 여러 경로를 통해 신군부 측에 지지를 요구하는 압력이 있던 상황이었다.



김오랑 비서실장에게도 신군부 측 회유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선배와 동기를 통해서 회유가 있었다. 김오랑 소령의 옆에서 특전사령관의 동태를 지켜보던 특전사 보안반장인 김충립씨 증언에서 보면 김오랑 소령의 의지는 단호했다. 그는 권총에 8발의 실탄을 장전한다. 그는 신군부 측 의도를 파악하고 있었고, 특전사령부의 생존과 사령관 안위를 지켜야만 했다. 그는 삽탄된 권총을 들고 사령관 집무실로 들어가서 출입문을 잠근다. 비서실을 통해서 진입한 체포조는 사령관 집무실이 잠겨있는 것을 알고 자물쇠를 향해 M-16을 일제히 발사한다. 동시에 안에 있던 김오랑 비서실장의 권총도 불을 뿜는다. 이렇게 끝까지 저항한 김오랑 중령은 복부와 허벅지, 가슴에 여섯 발의 총탄을 맞고 현장에서 사망한다. 체포조에서도 나 모 대위, 김 모 대위 그리고 심 모 상사가 김 소령의 총탄을 복부와 양손에 맞고 쓰러졌을 만큼 저항은 격렬했다.



김오랑 소령은 경남 김해에서 출생하여 69년 육사 25기로 임관해 2사단 수색중대를 거쳐 맹호부대로 월남파병을 다녀온다. 74년 3공수여단 중대장으로 보직명령을 받으면서 특전사와 인연은 시작된다. 특전사에서 중대장과 작전장교를 거쳐 지역대장까지 44개월이란 긴 보직을 마치고 소령으로 진급을 한 후 육군대학과정에 입교를 한다. 육대를 졸업한 후 다시 특전사로 원복을 한다. 대개는 특전사에서 이같이 오랫동안 근무를 하면 육대과정을 마치고 후방지역과 본인이 원하는 편안한 보직을 찾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시력장애가 있는 아내가 있었다. 아내의 시각장애로 2세를 가지는 것을 미룬 것은 물론이고 아내의 치료를 위해 수도권에 있는 특전사로 다시 원복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79년 2월에 특전사 5공수여단 부대대장으로 발령 받은 지 한 달 후에 운명의 사령관 비서실장으로 차출된다. 비서실장은 사령관을 업무상 보좌함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정확한 판단을 할 수 있도록 조언을 할 수 있는 위치로서 특전사에서 잔뼈가 굵은 김 소령이 적임자였던 것이다.



김오랑 소령의 부인인 백영옥씨는 남편 도움 없이는 외출도 자유롭지 못한 상태였다. 어쩌면 아내보다 하루라도 더 살다가 죽는 것이 김 소령의 소원이었을 것이다. 그 같은 아내를 12월의 그 날, 긴긴밤에 홀로 남겨두고 떠난 것이다. 당시 체포조를 끌고 온 3공수여단 15대대장인 박 모 중령(육사, 23기)과는 육사 선후배 사이로 같은 군인아파트에 사는 이웃이었다. 사건이 있기 며칠 전에도 동부인하여 저녁을 같이 했을 정도로 호형호제하는 사이였다. 남편의 죽음에 충격을 받고 완전 실명한 백씨는 노태우 정권이던 90년 전두환·노태우 대통령과 최세창, 박종규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려 하였으나 알 수 없는 이유로 보류되다 91년 6월에 의문의 추락사를 당한다. 남편을 잃고 어둡게 산 4000일이었다.



백씨는 화장되어 부산의 영락공원에 봉안되어 있었으나 연고자가 없어 지금은 부산시립묘지 외곽에 있는 무연고자 산골터에 뿌려져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다. 죽은 다음에도 같이 눕지 못하는 기구한 운명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녀가 죽기 2년 전, 남편이 죽음으로 지키고자 했던 정병주 특전사령관도 행방불명된지 139일이 되던 89년 3월에 양주 송추계곡에서 의문의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97년 대법원에서 12·12를 군사반란으로 판결을 내렸지만, 정 장군의 묘비는 여전히 비문 없는 백비(白碑)의 한(恨)으로 남겨져 있다.



김오랑 중령 추모회는 매년 6월 6일과 12월 12일에 현충원에서 조촐한 추도식을 연다. 김 중령의 추도식은 백비(白碑)의 한(恨)을 안고 잠든 정병주 특전사령관 묘역과 12·12 당시 사망한 국방부 헌병소속 정선엽 병장과 수경사 33헌병단 박윤관 상병의 묘역참배에 이어서 진행된다. 아직까지는 특전사나 육군사관학교 모두 추도식 참여의사를 보이는 곳은 없다. 12·12와 관련한 인사의 참여도 없다. 지난해 29주기 추도식에는 고인의 고등학교 동문들 참여가 있었다.



추모회는 불행한 시대에 잠시 살다가 떠나간 한 사람의 죽음이 아닌, 오래도록 우리 곁에 빛으로 살아있을 한 사람의 삶을 추모하고자 그의 어리석고 고집스러운 행동과 같은 질긴 끈을 놓지 않고 있는 것이다. '안일한 불의(不義)의 길보다 험난한 정의(正義)의 길'을 택한 김 중령의 죽음이 군인의 길을 밝히는 등불이 되기를 원하고 자유민주주의 세상을 살고 있는 건전한 국민들의 표상이 되기를 바란다.



30주기인 올해 12월에는 평전인 <어리석은 군인 김오랑>을 출판할 예정이다. 또 모 국회의원을 통해서 '김오랑 중령 무공훈장 추서 및 기념비 건립 건의안'을 발의할 예정이다. 현재 발의 전에 있는 건의안은 20여 명 공동발의자의 서명을 받았는데 12·12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 부관이던 육사동기생 황 모 의원과 동기생 권경석 의원, 서종철 의원의 참여를 기대하고 있다. 건의안 통과까지는 어려운 싸움이 되겠지만 좋은 결과를 통해 군 정훈교육 내용에 포함시켜 장병 교육에 쓰이길 희망한다. 더불어 이같은 의로운 죽음을 기억할 수 있도록 영화로도 제작되기를 기대한다.



우리에게는 김오랑 중령의 발자국을 더듬으면서 '12·12군사반란'과 '역사상 가장 긴 쿠데타'에 대한 남겨진 숙제를 완성할 의무가 남아있다. 12·12군사반란을 상황별로, 제대별로, 인물별로 다시 정리해야 할 것이고 전두환의 신군부가 12·12 군사반란, 중앙정보부장 겸직과정, 5·17 비상계엄 확대조치를 통한 정권탈취, 국보위를 통한 정권탈취 작업, 최규하 대통령의 하야, 전두환의 대통령 당선에 이르는 자유민주주의와 민주시민들을 조롱했던 8개월간의 역사를 다시 평가해야 한다. 이런 노력이 당시 민주시민세력과 위정자들의 안일함과 어리석음을 깨닫게 하는 반면교사(反面敎師)가 되기를 바란다.

출처 : 12·12 군사반란과 어리석은 군인 김오랑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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