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 수 9,485
혹 그대는 '혁명'을 꿈꾸시나요?
'일상 속의 나를 뒤집어 변화시키는' 혁명,
그래서 '나를 근본적으로 변혁시키는' 혁명을!
역사를 뒤흔든 혁명도 개인의 결단과 변화에서 시작됩니다.
거창한 얘기가 아닙니다.
그동안 일 안하면서 슬쩍 묻어가는것을 좋아했다면 이제 솔선해서 상품도 판매해보고,
칼출근에 칼퇴근을 즐겼다면 일찍 출근해서, 옆동료 책상도 한번 닦아주고, 아침행사도 열쓈히 참여하고
늦은시간까지 업무하는 동료들과 퇴근후 함께 술한잔도 하고,
회사의 고민이 무엇인지 경청도 하고, 무엇보다 그동안 잃었던 자신감과 용기를 회복하고...
일상의 습관이 바뀌면 삶이 바뀌고 삶이 바뀌면 역사도 바뀝니다.
'일상 속의 나를 뒤집어 변화시키는' 혁명,
그래서 '나를 근본적으로 변혁시키는' 혁명을!
역사를 뒤흔든 혁명도 개인의 결단과 변화에서 시작됩니다.
거창한 얘기가 아닙니다.
그동안 일 안하면서 슬쩍 묻어가는것을 좋아했다면 이제 솔선해서 상품도 판매해보고,
칼출근에 칼퇴근을 즐겼다면 일찍 출근해서, 옆동료 책상도 한번 닦아주고, 아침행사도 열쓈히 참여하고
늦은시간까지 업무하는 동료들과 퇴근후 함께 술한잔도 하고,
회사의 고민이 무엇인지 경청도 하고, 무엇보다 그동안 잃었던 자신감과 용기를 회복하고...
일상의 습관이 바뀌면 삶이 바뀌고 삶이 바뀌면 역사도 바뀝니다.
2011.08.26 15:52:13
나로 부터의 혁명을 말씀하셨군요.
과거의 인습들이 오랜동안 축적되어 습관의 노예로 전락해버린 자신으로 부터
해방을 꿈꾸며 매일 자신을 뒤집는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굳어져버린 습관과의 싸움에서 이겨내기란 결코 쉽지가 않은것 같네요.
변화된 미래의 내 모습을 위해 다시한번 작은 시작을 시도해 보렵니다.
과거의 인습들이 오랜동안 축적되어 습관의 노예로 전락해버린 자신으로 부터
해방을 꿈꾸며 매일 자신을 뒤집는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굳어져버린 습관과의 싸움에서 이겨내기란 결코 쉽지가 않은것 같네요.
변화된 미래의 내 모습을 위해 다시한번 작은 시작을 시도해 보렵니다.
2011.08.26 18:04:28
그동안 몸에 밴 습관, 습성이 어디 한순간에 변하겠습니까??
머리속엔 항상 다른 생각만 가득차있을텐데...
동료들과 술한잔 할 생각이 있다면 지금까지 이런 만행은
벌어지지도 않았을껍니다. 그들은 그냥 꽉 막힌 밀납인형같은
사람들이니깐요..
머리속엔 항상 다른 생각만 가득차있을텐데...
동료들과 술한잔 할 생각이 있다면 지금까지 이런 만행은
벌어지지도 않았을껍니다. 그들은 그냥 꽉 막힌 밀납인형같은
사람들이니깐요..
2011.08.27 09:52:40
개티 발바리와 노쇄팀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입니다
=======================================================
[사건과 사람] 총탄 3발 맞았는데 진급 차별… 표창도 버렸다
96년 강릉 무장공비 침투… 추격작전서 부상 이종갑 예비역 소령
"참모총장 표창이요? 쳐다보기도 싫어 내버렸어요."
23일 서울 공항동 자택에서 만난 예비역 소령 이종갑(55) 씨는 1996년 그 날의 얘기를 꺼내자 손사래를 쳤다. 무장 침투한 북한군의 총탄을 3발이나 맞았으니 몸서리칠 법도 하건만 생각할수록 울화가 치미는 듯 목소리가 커졌다. "차라리 죽는 건 두렵지 않아요. 하지만 사지(死地)에 투입됐던 부하들을 외면하는 군 지휘부의 냉대와 차별은 견딜 수 없었죠."
꼭 잡고 싶었다, 내 몸을 던져서라도
↑ 이종갑 전 육군 소령이 1996년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 때 북한군의 총탄이 관통해 움푹 들어간 왼팔을 보여주고 있다. 이씨는 "영광의 상처인 줄 알았는데 이제는 남에게 보여주기 싫은 아픈 기억일 뿐"이라고 말했다. 신상순 선임기자 ssshin@hk.co.kr
이 씨는 군 생활 18년 중 10년을 북파공작원(HID) 교관으로 근무했다. 대북침투조를 양성하는 극비 임무다. 이 씨 자신도 강하훈련, 수중폭파훈련 등 온갖 특수훈련을 마친 정예 요원이었다.
96년 9월18일, 북한군 25명을 태운 잠수함이 강릉 대포동 앞바다에서 좌초된 채 발견됐다. 침투 당일 이광수는 민가에 숨어있다 잡혔고 이후 11명은 자살, 11명은 교전 끝에 사살됐다.
이들은 모두 잠수함 승조원에 불과했다. 핵심은 살아 남은 나머지 2명이었다. 김정일이 "1개 사단 병력(8,000~1만 명)과도 바꾸지 않겠다"고 공언한 최정예 침투조였다.
이 씨는 당시 육군 3군단 정보분석장교로서 북한군의 이동경로를 예측하고 대응책을 짰다. 하지만 남은 2명은 보란 듯이 칠성산, 홍천, 오대산 등 강원도 일대를 누볐다. 공수부대와 특전사, 특공여단이 저격조로 투입됐고 군인과 예비군 수천 명이 가세했지만 좀체 소득이 없었다.
이 씨는 "침투조가 향로봉을 거쳐 북한으로 되돌아가면 끝장이었다. 또한 단풍철이라 설악으로 넘어가면 민간인 피해가 우려됐다. 그래서 촘촘하게 포위망을 짜고 운신의 폭을 좁히는데 주력했다. 자연히 시간이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북한군 2명은 포위망을 농락하며 병사와 민간인들을 조준 사격했다. 시신을 흔적 없이 묻어 출동한 경찰이 허탕을 치기도 했다. 심지어 아군끼리 오인 사격하는 경우도 있었다. 병사와 민간인 15명이 죽고 10여명이 다쳤다.
그는 "저들의 눈에는 사방이 손쉬운 표적이었다. 우리는 울창한 숲 속에서 단 2명을 잡아야 했다. 인명피해가 늘고 세간의 지탄이 쏟아지면서 피가 말랐다. 빨리 끝내야 했다"고 말했다.
세 발의 총성, 추격의 끝
침투 49일째인 11월5일 새벽, 강원 인제군 용대리에서 초병들이 북한군과 교전했다. 이 씨는 '이번에는 반드시 잡아야 한다'고 되뇌이며 현장에 출동했다. 탄피를 분석하며 도주방향을 예측하던 순간, 해가 막 떠올라 시야가 잠시 가려지는 사이 숲 속에서 "탕, 탕, 탕"하는 세 발의 총성이 울렸다. 첫 발은 이 씨의 왼팔 윗부분을 관통해 뼈와 살이 뜯겨졌고, 나머지 두 발은 팔꿈치 아랫부분을 스쳤다. 계속되는 총격에 근처에 있던 장교 3명과 병사 1명이 숨지고 13명이 다쳤다.
북한군 2명은 뒤쪽에서 덮친 특전사 요원들에 의해 모두 사살됐다. 기나긴 추격전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남은 1명이 더 있다"는 소문이 꼬리를 물었지만 이 씨는 "다음 날 바로 작전이 종료됐다. 북한군이 더 있었다면 그랬겠나"라며 강하게 부인했다. 군 당국도 "놓친 북한군은 없다"는 입장이다.
이 씨는 "너덜해진 왼팔에서 피가 뿜어져 나오고 전기에 감전된 듯 찌릿했지만 병원 수술실에 들어가서야 통증이 밀려왔다. 이제야 끝났다는 안도감이 더 컸다"고 말했다.
부상은 심했다. 오른다리 정강이 뼈를 잘라 왼팔에 붙이고 혈관도 이식했지만 뼈와 근육을 간신히 연결하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1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살은 여전히 움푹 파여있고 왼팔과 왼손가락은 힘을 쓰지 못한다.
훈장 못 받고 진급도 탈락, 군이 나를 버렸다
그래도 망가진 몸은 상관없었다. 진짜 시련은 그 다음이었다. 병원에서 1년 정도 치료를 받자 육군 3군단은 "치료기간이 길어져 소속부대가 바뀌었다"며 관사에서 나가라고 명령했다. 졸지에 가족들은 떠돌이 신세가 됐다. 900여 만원의 병원비도 절반 정도는 본인이 먼저 내고 몇 년이 지나 할부로 나눠 받는 방식이었다.
작전이 끝나자 40여명이 훈장, 20여명이 대통령표창을 받았다. 부상자들은 모두 참모총장 표창에 그쳤다. 그는 "작전에 참여하지도 않은 군 고위층이 훈장을 받았다. 우리는 거들떠도 안보더라. 이건 아니었다"고 말했다.
이듬해인 97년, 중령 진급심사가 있었다. 그는 전상(戰傷)을 입었고 과거 최우수 교관으로 선정되는 등 촉망 받는 군인이었기에 진급 1순위로 꼽혔다. 하지만 탈락했다. 이 씨는 "주변의 육군사관학교 출신들은 심지어 지뢰지역에 잘못 들어가 다리를 다쳐도 진급했다. 난 전쟁터나 다름없는 곳에 뛰어들었지만 비주류인 3사관학교 출신이었다. 차별을 견디며 더 이상 군에 남을 자신이 없었다"고 말했다.
전역 후 잇따라 사업에 실패하면서 가세가 기울었다. 지금은 연금과 아내가 벌어오는 돈으로 두 자녀를 賓帽竄置求?형편이다. 반면 당시 침투했던 북한군 이광수는 해군 군무원에 채용돼 정신교육교관으로 근무하고 있다. 대조적인 처지에 억울할 만도 하다.
그러나 이 씨는 "그런 생각은 단 한번도 안 했다. 그도 나도 각자 군인으로서 임무를 수행한 것뿐이다. 개인적인 감정은 없다"고 잘라 말했다.
이 씨는 다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손자병법에 '천일양병, 일일용병(千日養兵, 一日用兵)이라고 했다. 결국 군인은 한 번 싸우는 게 중요하다. 우리가 몸을 바쳤기에 침투한 무장공비를 잡을 수 있었다. 그렇다고 망신창이가 된 부하를 내팽개치면 어떡하나. 더 이상 나 같은 군인은 없어야 한다
================================================================
더 이상 나 같은 KT 직원도 없어야 합니다
경쟁현장에서 맘대로 부려먹고.. 강퇴시키는 자들.
상품판매? 그것은 가식이요 핑계입니다
결국 그들의 입맛에 맞는냐 안맞느냐가 관건입니다
그들에겐 경쟁승리 보다도 실적 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있었으니
비로 "자기들의 비리를 누가 알고 있는가!" 이것이었습니다
=======================================================
[사건과 사람] 총탄 3발 맞았는데 진급 차별… 표창도 버렸다
96년 강릉 무장공비 침투… 추격작전서 부상 이종갑 예비역 소령
"참모총장 표창이요? 쳐다보기도 싫어 내버렸어요."
23일 서울 공항동 자택에서 만난 예비역 소령 이종갑(55) 씨는 1996년 그 날의 얘기를 꺼내자 손사래를 쳤다. 무장 침투한 북한군의 총탄을 3발이나 맞았으니 몸서리칠 법도 하건만 생각할수록 울화가 치미는 듯 목소리가 커졌다. "차라리 죽는 건 두렵지 않아요. 하지만 사지(死地)에 투입됐던 부하들을 외면하는 군 지휘부의 냉대와 차별은 견딜 수 없었죠."
꼭 잡고 싶었다, 내 몸을 던져서라도
↑ 이종갑 전 육군 소령이 1996년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 때 북한군의 총탄이 관통해 움푹 들어간 왼팔을 보여주고 있다. 이씨는 "영광의 상처인 줄 알았는데 이제는 남에게 보여주기 싫은 아픈 기억일 뿐"이라고 말했다. 신상순 선임기자 ssshin@hk.co.kr
이 씨는 군 생활 18년 중 10년을 북파공작원(HID) 교관으로 근무했다. 대북침투조를 양성하는 극비 임무다. 이 씨 자신도 강하훈련, 수중폭파훈련 등 온갖 특수훈련을 마친 정예 요원이었다.
96년 9월18일, 북한군 25명을 태운 잠수함이 강릉 대포동 앞바다에서 좌초된 채 발견됐다. 침투 당일 이광수는 민가에 숨어있다 잡혔고 이후 11명은 자살, 11명은 교전 끝에 사살됐다.
이들은 모두 잠수함 승조원에 불과했다. 핵심은 살아 남은 나머지 2명이었다. 김정일이 "1개 사단 병력(8,000~1만 명)과도 바꾸지 않겠다"고 공언한 최정예 침투조였다.
이 씨는 당시 육군 3군단 정보분석장교로서 북한군의 이동경로를 예측하고 대응책을 짰다. 하지만 남은 2명은 보란 듯이 칠성산, 홍천, 오대산 등 강원도 일대를 누볐다. 공수부대와 특전사, 특공여단이 저격조로 투입됐고 군인과 예비군 수천 명이 가세했지만 좀체 소득이 없었다.
이 씨는 "침투조가 향로봉을 거쳐 북한으로 되돌아가면 끝장이었다. 또한 단풍철이라 설악으로 넘어가면 민간인 피해가 우려됐다. 그래서 촘촘하게 포위망을 짜고 운신의 폭을 좁히는데 주력했다. 자연히 시간이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북한군 2명은 포위망을 농락하며 병사와 민간인들을 조준 사격했다. 시신을 흔적 없이 묻어 출동한 경찰이 허탕을 치기도 했다. 심지어 아군끼리 오인 사격하는 경우도 있었다. 병사와 민간인 15명이 죽고 10여명이 다쳤다.
그는 "저들의 눈에는 사방이 손쉬운 표적이었다. 우리는 울창한 숲 속에서 단 2명을 잡아야 했다. 인명피해가 늘고 세간의 지탄이 쏟아지면서 피가 말랐다. 빨리 끝내야 했다"고 말했다.
세 발의 총성, 추격의 끝
침투 49일째인 11월5일 새벽, 강원 인제군 용대리에서 초병들이 북한군과 교전했다. 이 씨는 '이번에는 반드시 잡아야 한다'고 되뇌이며 현장에 출동했다. 탄피를 분석하며 도주방향을 예측하던 순간, 해가 막 떠올라 시야가 잠시 가려지는 사이 숲 속에서 "탕, 탕, 탕"하는 세 발의 총성이 울렸다. 첫 발은 이 씨의 왼팔 윗부분을 관통해 뼈와 살이 뜯겨졌고, 나머지 두 발은 팔꿈치 아랫부분을 스쳤다. 계속되는 총격에 근처에 있던 장교 3명과 병사 1명이 숨지고 13명이 다쳤다.
북한군 2명은 뒤쪽에서 덮친 특전사 요원들에 의해 모두 사살됐다. 기나긴 추격전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남은 1명이 더 있다"는 소문이 꼬리를 물었지만 이 씨는 "다음 날 바로 작전이 종료됐다. 북한군이 더 있었다면 그랬겠나"라며 강하게 부인했다. 군 당국도 "놓친 북한군은 없다"는 입장이다.
이 씨는 "너덜해진 왼팔에서 피가 뿜어져 나오고 전기에 감전된 듯 찌릿했지만 병원 수술실에 들어가서야 통증이 밀려왔다. 이제야 끝났다는 안도감이 더 컸다"고 말했다.
부상은 심했다. 오른다리 정강이 뼈를 잘라 왼팔에 붙이고 혈관도 이식했지만 뼈와 근육을 간신히 연결하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1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살은 여전히 움푹 파여있고 왼팔과 왼손가락은 힘을 쓰지 못한다.
훈장 못 받고 진급도 탈락, 군이 나를 버렸다
그래도 망가진 몸은 상관없었다. 진짜 시련은 그 다음이었다. 병원에서 1년 정도 치료를 받자 육군 3군단은 "치료기간이 길어져 소속부대가 바뀌었다"며 관사에서 나가라고 명령했다. 졸지에 가족들은 떠돌이 신세가 됐다. 900여 만원의 병원비도 절반 정도는 본인이 먼저 내고 몇 년이 지나 할부로 나눠 받는 방식이었다.
작전이 끝나자 40여명이 훈장, 20여명이 대통령표창을 받았다. 부상자들은 모두 참모총장 표창에 그쳤다. 그는 "작전에 참여하지도 않은 군 고위층이 훈장을 받았다. 우리는 거들떠도 안보더라. 이건 아니었다"고 말했다.
이듬해인 97년, 중령 진급심사가 있었다. 그는 전상(戰傷)을 입었고 과거 최우수 교관으로 선정되는 등 촉망 받는 군인이었기에 진급 1순위로 꼽혔다. 하지만 탈락했다. 이 씨는 "주변의 육군사관학교 출신들은 심지어 지뢰지역에 잘못 들어가 다리를 다쳐도 진급했다. 난 전쟁터나 다름없는 곳에 뛰어들었지만 비주류인 3사관학교 출신이었다. 차별을 견디며 더 이상 군에 남을 자신이 없었다"고 말했다.
전역 후 잇따라 사업에 실패하면서 가세가 기울었다. 지금은 연금과 아내가 벌어오는 돈으로 두 자녀를 賓帽竄置求?형편이다. 반면 당시 침투했던 북한군 이광수는 해군 군무원에 채용돼 정신교육교관으로 근무하고 있다. 대조적인 처지에 억울할 만도 하다.
그러나 이 씨는 "그런 생각은 단 한번도 안 했다. 그도 나도 각자 군인으로서 임무를 수행한 것뿐이다. 개인적인 감정은 없다"고 잘라 말했다.
이 씨는 다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손자병법에 '천일양병, 일일용병(千日養兵, 一日用兵)이라고 했다. 결국 군인은 한 번 싸우는 게 중요하다. 우리가 몸을 바쳤기에 침투한 무장공비를 잡을 수 있었다. 그렇다고 망신창이가 된 부하를 내팽개치면 어떡하나. 더 이상 나 같은 군인은 없어야 한다
================================================================
더 이상 나 같은 KT 직원도 없어야 합니다
경쟁현장에서 맘대로 부려먹고.. 강퇴시키는 자들.
상품판매? 그것은 가식이요 핑계입니다
결국 그들의 입맛에 맞는냐 안맞느냐가 관건입니다
그들에겐 경쟁승리 보다도 실적 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있었으니
비로 "자기들의 비리를 누가 알고 있는가!" 이것이었습니다
2011.08.28 12:30:35
민동들이 꼭 읽도록 해야겠네요
사실 민똥 몇명 때문에 회사 이미지 정말 좋지 않아요
이번에 봇수노조도 만들었다고 하는데...
하루빨리 내 보내든가. 아님 스스로 변화되어 일번 동료들에게
도움이 됬음합니다 . 그래서 주가도 10만원 정도 ㅋ~
사실 민똥 몇명 때문에 회사 이미지 정말 좋지 않아요
이번에 봇수노조도 만들었다고 하는데...
하루빨리 내 보내든가. 아님 스스로 변화되어 일번 동료들에게
도움이 됬음합니다 . 그래서 주가도 10만원 정도 ㅋ~
2011.08.28 14:22:21
민똥들아 이제 똥 같은 소리는 좀 그만 해라..
니들도 직원이면서 왜 이렇게 똥같은 짓들만 하고 다니냐
니들도 회사에서 월급을 받으면서 왜 통신비 인하를 주장하는 건데...
이런 똥같은......
그런 주장을 하려면 회사를 관두고 나가서 떠들어라 이런 똥같은 넘들아...
니들도 직원이면서 왜 이렇게 똥같은 짓들만 하고 다니냐
니들도 회사에서 월급을 받으면서 왜 통신비 인하를 주장하는 건데...
이런 똥같은......
그런 주장을 하려면 회사를 관두고 나가서 떠들어라 이런 똥같은 넘들아...
2011.08.28 19:08:34
9시 땡하고 들어와서 6시 땡하고 나가는 인간들...
하루에 고장건수 두 건 처리하는 인간들이 힘들게
고생하는 직원들의 사정을 이해할까?
자신이 월급받아 애들 키우고 지금까지 먹고 살아온
회사와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는 동료들을 위해
제발 아주 멀리~~멀리 떠나가 주시면 안되겠소.
정말~~정말 부탁이오.
하루에 고장건수 두 건 처리하는 인간들이 힘들게
고생하는 직원들의 사정을 이해할까?
자신이 월급받아 애들 키우고 지금까지 먹고 살아온
회사와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는 동료들을 위해
제발 아주 멀리~~멀리 떠나가 주시면 안되겠소.
정말~~정말 부탁이오.

균형적인 자기 쇄신의 원칙으로 규칙적으로 자신을 새롭게 하자.
쇄신은 우리가 가진 최대의 자산인 '자기자신'을 유지 및 향상시키는 역할을 한다.
습관은 우리가 인생에서 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투자이다.
이것이야 말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인생에 대한 투자이며,
삶을 살아가고 공헌할 수 있는 도구에 대한 투자이다.
오늘 하루도 치열하게 열심히 살다보면 3주후의 자신은 많이 변해 있을 것이며
혁명이 일어 난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