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12사태시 김오랑소령을 기억하시나요?
정병주 장군을 기억하시나요?
12ㆍ12 쿠데타 성공 후 군부를 장악한 정치군인들.
13일 새벽 3시, 송파구 거여동의 특전사령부 건물을 뒤흔든 요란한 총성은 군사 반란의 성공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반란을 진압하려던 정병주 특전사령관을 체포하기 위해 들이닥친 쿠데타군과 사령관을 보호하려던 특전사령관 비서실장 김오랑 소령 사이에서 벌어진 총격전이었죠. 이 총격전에서 반란에 동원된 3공수여단 15대대 병력 10여 명에 의해 김오랑 소령이 피살되고, 정병주 특전사령관은 왼팔에 관통상을 입은 채로 보안사 분실로 끌려갑니다. 공수부대의 총사령관이 휘하 부하들에 의해 체포되는 이 장면은 12.12 군사반란의 성격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육사 25기 출신의 김오랑 소령은 육군대학을 수석졸업하고, 특전사에서 잔뼈가 굵은 유능한 장교였습니다. 사령관의 곁을 지켜야 할 참모들마저 반란세력에게 회유 당하거나 일신의 안전을 위해 몸을 피했을 때, 김 소령은 권총 한 자루를 가지고 정병주 사령관의 곁을 지켰습니다. 쿠데타군이 쏜 M-16 소총탄에 복부와 허벅지, 가슴에 여섯 발의 총상을 입은 그는 현장에서 사망합니다. (총격전 직후 현장을 보았던 목격자는 김오랑 소령이 숨은 쉬고 있었고, 빨리 후송했더라면 살았을 수도 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김 소령의 비극은 그 한 사람의 죽음만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역사의 잔인한 수레바퀴는 집안을 풍비박산시켰죠. 신혼의 단꿈에 젖어 있던 부인(백영옥)은 사랑하는 남편을 잃은 충격에 눈이 멀었고, 비명에 간 막내아들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던 김 소령의 어머니는 2년 뒤 눈도 채 감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들이 반란군의 총탄에 맞아 숨진 것도 원통한데 그 시신마저 암매장(부대 뒷산에 매장되었던 김 소령의 시신은 이듬 해 2월28일, 육사 동기들의 항의와 노력으로 국립묘지에 안장되었습니다) 되었으니 어머니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김 소령의 부인 백영옥 씨는 거주하던 군인 아파트에서 퇴거당해 갈 곳조차 없었고, 몇 번이나 삶을 포기할 생각까지 했지만, 마음을 가다듬고 장애인 보호시설과 양로원을 찾아다니며 봉사활동을 통해 고통을 잊으려 노력했습니다. “꿈속에 그이가 나타나 아무 말 없이 빙긋 웃기만 해요. 다가가면 바람이 세차게 불어 접근하지 못하고 나는 울기만 해요.” (동아일보 1990.12.12)
6공화국이 들어서고 1990년 고 김오랑 소령은 중령으로 한 계급 추서되었지만 백영옥 씨의 한은 풀리지 않았습니다. 죽은 남편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전두환, 노태우 전현직(1990년 당시) 대통령과 최세창 당시 특전사 여단장 등 6명을 상대로 소송을 준비하던 백영옥 씨는 돌연 병원에 입원한 후 고소장 접수를 유보 합니다. 세간에는 모종의 압력이 있었을 것이라는 풍문이 돌지만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91년 6월, 백영옥 씨는 자택에서 의문의 실족사를 당합니다. 경찰은 자살로 추정했지만 조카 김영진 씨 등 주변인물에 따르면 남편의 명예회복을 위해 백방으로 분주하게 뛰던 백영옥 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이유는 없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인에 의문이 제기되었지만 백영옥 씨의 시신은 화장되어 부산 영락공원 무연고 납골당에 안치됩니다.
자신의 눈앞에서 비서실장 김오랑 소령이 목숨을 잃는 것을 본 정병주 특전사령관의 여생도 불행했습니다. 부하가 쏜 총에 관통상을 입은 팔은 두 번의 수술을 받아야 했고, 강제 예편된 후에는 심한 우울증에 시달렸습니다. 생계를 위해 친구들과 함께 투자했던 종이상자 제조공장도 부도가 나서 시름 속에 세월을 보내야 했죠. 그러던 중 1989년 3월 4일, 경기도 송추 유원지 야산 중턱에서 나무에 목을 맨 정병주 사령관의 시신이 발견됩니다. 다섯 달 전, 집을 나갈 때 옷차림 그대로였습니다. 유서도 없었고 시신 주변엔 빈 소주병 3개만 있었죠. 군정종식을 위해 당시 명동성당에서 열린 기도회에 빠짐없이 참석할 정도로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그의 죽음에 의혹이 제기되었지만 경찰은 단순 자살로 처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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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슬프다.
개 돼지 보다 못한
경영빙자한 일부 KT경영 폭력배들아
내 힘이 닿는한 니들을 찢어죽일 것이다
왜 우린 이런 역사를 가졌을까요
살인입니다. 그것도 아주 잔인한 살인입니다
저도 공범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 가족에게 사죄하여야 합니다
제2의 인생은 자신의 몫입니다
20~30년 회사 다닐동안 충분히 준비를 해야 합니다
위사건으로 KT를 비방하는것은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망자에게 누가 되지않도록..X똥들은 자제하기 바람....
각종 여론플레이 복수노조에 대비하는거는 알겠는데....
그럴수록 민심은 멀어진다니.
타인의 죽음을 두고 이를 이용하려는
것은 망자를 두번 죽이는 것이 아닐런지..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고인을 이용하는 걸 보니
서글퍼지네요.
자살을 선택 할 수 밖에 없었을 그 절박함 심정들,, 누구나 살면서 한번 쯤은 겪을 법한 일입니다.
그럴 때 중심을 잡을 수 있을만한 계기가 있었더라면, 결과가 이러지는 않았을 터인데,
자살은 누구의 탓도 될 수 없습니다. 회사의 탓도 아닙니다.
잘 되면 본인 탓이고, 어긋나면 남의 탓을 돌리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회사에서의 일들이 영향력이 컸더라도,,, 남아있는 가족들을 생각해서 저것과 같은 선택은 옳지 못합니다..
부탁드립니다. 이런 안타까운 사연을 본인들의 목적을 위해 선량한 케이티 일반직원들을 선동하지 마십시오.
당신께서 일컫는 불량배라는 누군가도 가족이 있고, 사연이 있습니다.
당신이 맹목적으로 비난할만한 사람은 어디에도 없어 보입니다.
조국의 통일 위하고 사회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서 그럴싸한 궤변가들에게
"너 자신을 알라"하고 독배를 드신 분이 계셨습니다
조국과 인간을 무시하고 순간순간의 논리에 빠져버린 이른바 소피스트들에게 그는 그가 마지막 던진 말입니다
윗글 안타까움님! 진정 고인의 명복을 비는 맘이 있나요?
그렇다면 사우를 사지로 내몰고 사모님을 자살하게하고 가정을 풍지박산시킨 범인을 잡아야 하여야지요
그리고 글르 추종하는 폭력배들이 다시는 KT에서 뛰놀지 못하게 하여야지요
다시는 이런 슬픔이 없도록 하여야지요... 이게 선동입니까?
이게 선동입니까?
아직도 그들 폭력배들이 도처에 "경영자입네~~~~~~~~ 하면서" 깔려 있는데 이게 선동입니까?
님에게 이게 선동으로 들립니까?
이게 선동이란 말입니까? 이게.....
주장이 다르면 다툼이 생기고 욕심이 과하면 분노로 변한다.
모두가 자기의식이 강한 자에게 나타나는 불통의 처세술이다.
사람은 겸손해야 한다.
고 이병철회장은 현 이건희회장에게 경청이란 어록을 유산으로
남겼다한다.
입을 먹고 귀를 열라는 말이다.
먼저 남의 흉중을 헤아려야 나의 의식이 발아한다.
심지어 어린아이한테도 배울게 있는게 세상이치이기때문이다.
겸손한 자만이 발전을 하고 진화를 이룬다.
햇빛은 누구에게나 고루 비추나 마음을 여는 사람에게만 건강과
행복을 가져다준다.
다툼은 비슷한 사람끼리 경쟁하는 것이고
겸손은 우월한 사람만이 행할 수 있는 미덕이다.
당신이 진정 행복한 인생을 원한다면
남과 자연과 우주와 다투어 악연을 만들지말라!
찢어죽인다는 등 살벌한 말
이런 글들을 작성하는 사람들은 인간이기를 포기한 사람들인가?
아니면 단지 짐승처름 뭐가 뭔지 아무것도 모르는
인간들인가
무지몽매....극치를 보이고 있군요
조직내에 고인이 되신분은 참 안타깝지만...
적절하진 않다고 생각됩니다. 너무 사고가
극단적인거 같네요.
고인이 되신분 괜히 언급해서 뭘 어떻게 하려는건데
생전엔 당신도 관심없다가 이제와서 지껄이는건데...
추잡한 짓 그만 합시다.
고인의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은 여러가지 요인이 있었겠지요.. 모든 것을 회사와 조직의 탓으로 몰아가려는 분들.. 문제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년간 수많은 회사에서 이런 저런 사유로 명퇴 압력을 받으시는 모든 분들이 그러한 선택을 해야 합니까 ?
세상을 떠나신 분을 이용하려 하지 말고.. 고이 명복을 빌어 주시기를 당부드립니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는 말을 하지나 말던지
명퇴압력을 받은 분 모두가 그런 선택을 해야됩니까? 잔소리를 말던지..
하여튼 아이큐 50가지고 잔머리 굴리는 꼬라지 하고는...
사람이 죽어나가고 그 범인들리 버젖이 활보하고 있는데도
그 범인 잡을 생각은 전혀안하고 사태가 조용히 수습되기만을 학수고대하는 잔머리들
더럽다. 사람이 죽어나가고 가정이 파탄되고 어린 애들이 있다 이놈들아!
빙산의 일각임에도 이것이 고인의 죽음을 이용하는 것이냔 말이다..... 육시를 할 놈들
나는 공산당원이 아니었으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엔 유태인을 숙청했다.
나는 유태인이 아니었으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엔 노동조합원을 숙청했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엔 가톨릭교도를 숙청했다.
나는 개신교도였으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엔 나에게 왔다.
그 순간에 이르자. 나서줄 사람이 아무도 남지 않았다.
- 마르틴 니묄러
더이상의 댓글이나 고인과 관련된 일로 이 사이트에서 다른 유언비어로 한 가족의 슬픔을 호도 하는일이 없도록 자제하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작년에 고인(최철순)이 사망하기 3개월전에 고인의 아버님이 가족과의 불화로 자살(2010년 6월)이라는 극한 선택을 하셨습니다.(지방 일간지 보도됨)
집안의 장남인 고인(최철순)은 그 사실을 직원들이나 주변 지인들에게 알리지 않고 가족끼리만 장례를 치루었습니다.
(고인 가족의 말 인용) 그후에 아버님의 사망 소식을 주변 지인들이 듣고 얘기를 꺼내는 과정들이 몇번 있었는데 완강히 부인을 하였고 그 사실을 감추기 위해 혼자서 고민하는 과정에서 극도의 우울증 또는 대인 기피증 증세를 보이다가, 2010년 8월에는 본인이 회사 생활하기가 어렵다며 명퇴를 하거나 리후레쉬 휴가가 가능하면 리후레쉬 휴가를 해달라고 요청하였고
2010년 9월말로 리후레쉬 휴가를 내고 1년 쉬는것으로 결정된 상태에서 갑작스런 사망에 이른 것 입니다. 아버님이 사망하시기
전까지 회사에서 본인 업무를 성실하게 수행하였던 분으로 강제 명퇴 압력이나 기타 회사에서 어떤 압박등은 없었는데, 자세한
내막을 모르시는 분들이 짐작하여 글을 올리신것 같습니다. 고인의 가족분들도 이런 사실을 다 알고 계시기에 조용히 세분의
장례를 차례로 치루시면서도 아무 말씀이 없으셨는데 너무들 하신거 같습니다.
더이상 이번 일로 이 사이트에서 논쟁이 벌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글을 올렸습니다.

그들은 영혼조차 죽일 놈들입니다.
자녀들은 저희들이 맘으로부터 챙겨드릴 것입니다